죄를 고백하는 문화와 명예와 체면의 문화

서구의 문화적 틀은 기독교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바울 서신서이고, 바울 서신서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어거스틴의 바울의 이해에 입각해서 만들어 졌다. 

한국인들은 그에 비해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이 조선 5백년을 지배했다. 1차적 무의식 층은 유교이다. 그래서 사회적 틀과 문화와 조직을 규정하는 것은 성리학이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죄와 죄사함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 윤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에서 자기 중심성에 기초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개인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원리의 기초는 모든 것을 아는 전지한 하나님의 존재이다. 특히나, 개신교 이후의 기독교 사회는 개인주의적 사회를 전환된다. 이 사회에서의 이기적 개인을 내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장치는 결국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절대적 지혜를 가진 절대적 사랑을 가진 신의 존재였다. 

유교적 사회는 기본적으로 체면 윤리로 유교적 윤리의 실천을 강제하려 했다. 가문의 위신 체면이 최우선이었다. 개인적 불명예는 둘째치고 가문의 불명예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구성원에 대한 공동체 내부의 처벌은 가혹하고 집요했다. 왜냐하면 공동체 전체의 체면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 죄를 쉽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왜냐하면 나만 쪽팔리면 되는 문제가 아니였다. 그리고 가문을 뛰어넘어 학파, 당파로 나누어진 구조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유교적 사회에서는 전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것은 처분에 맏기는 사과(apologize)를 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대신에 유감을 표명한다. 즉, 잘못한 것에 대한 감정이 있으나, 나도 이유가 있다 또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자기 합리화를 내포함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죄악의 문제를 끝내고 문제를 대충 덮으려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적 성선설과는 연결이 되어 있다. 즉, 나도 선의에 의해서 했는데 결과적으로 일로 인해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다라는 마음인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원죄를 인정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자기를 포함한 누구나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이를 경계해야 한다. 혹 죄를 지으면 이를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고백한 자에 대해서는 나도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받았던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유교 세계에서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도심은 미비하고 인심은 위태 위태하다는 말은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현실 인식은 기독교 세계와 동일하다. 즉, 잘못을 할,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매운 높은 것이 인간 상태라는 것은 인정한다.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죄를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천연적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 자체가 죄임을 인정하고 모두가 죄인이고 미천한 자임을 인정하는 인간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한 현실적 윤리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즉,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전진해서 군자가 되어야 함을 촉구하는 윤리체계를 구축했다. 스스로 대인이고 군자라고 믿는 거대한 에고를 가진 자들을 양산했다. 즉, 이상론에 입각해서 윤리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정체 사회 체계를 구축했다. 

이상과 현실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의식을 장착해서 강화된 에고로 예민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윤리를 지킬 것을 강제하기 위해서 체면 중시 문화를 키웠다. 수치의 문화를 키운 것이다. 

인간 존재의 참담한 현실 인식 없이 사람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유교적 윤리의식, 유교적 지식으로 인해 스스로 군자라고 여기거나 군자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죄를 인정하는 순간 참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에 무너진다. 에고의 수치심의 감정을 통해서 죄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수치심의 문화에서는 결사적이다. 에고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죄의 고백과 참회, 진정한 돌이킴, 그리고 용서의 프로세스가 우리 문화에서는 빈약하다. 오로지 나(ego)를 위해서 수치심을 피하려고 하는 문화에서는 나(ego) 보다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는 Apologizing이 있을 수 없다. 


성리학의 실수와 실패 (근본주의의 실패)

결국 에고의 욕심과 잔꾀가 논리에 시스템에 구멍을 낸 것이다. 먼저 기독교의 실패부터 살펴 보면 유가의 실패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초기 기독교는 사랑의 법에 따른 삶의 열매를 중시 했다. 이 삶에는 사실 내적 믿음의 요소가 먼저 있고,  내적 믿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종을 동반한 삶으로 따르는 것이 핵심이었다.

결국 종교 엘리트가 지배하는 제도 기독교가 되면서 사랑의 삶은 엘리트를 위한 종교적 공로를 중시하는 것으로 변질 되었다. 부패한 중세 카톨릭에서 이는 구원은 인간이 공로를 세우고 구원을 구매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변질 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 것은 당시 교황권을 주변에 있었던 부패 세력이었다. 교황에게 충성하는 것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종교적 공로가 되었다. 결국 교황은 종교적 행위, 곧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서 선동하여 십자군을 조직해서 중동에서 대량 학살을 일으켰다. 

개신교는 구원을 사고 파는 참담함에 대항하기 위해서 내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러 세대가 흘러 이 시대의 한국 개신교는 순종 없는 삶이 없는 값싼 복음으로 변질해 버렸다. 개신교 목사의 영업질에 제자도에 따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종교 엘리트들이 먼저 타락했고, 상식에 벗어난 논리로 약한 사람들을 홀려 버린 것이다. 

자기들만 지옥에 가지 않고 순진하고 교육 받지 못한 다수 민중도 진리에 접근을 방해하고 왜곡했다. 예수 당시의 종교 기득권들자들과 다름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들 스스로 종교 엘리트라고 믿는 부패한 이들은 순진한 이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되어 버렸다. 

유가는 결과적으로 실패 했다. 삶에서의 천명의 실행에 초점을 맞추고자 부실한 타락한 불교 또는 퇴락한 도교에 반발해서 유교는 철저하게 현실 세계의 인륜을 중시했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악의 트리오들, 곧 욕심과 에고의 화신들은 시스템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원칙은 기독교에서와 동일하다. 유교가 주목 받게 된 그 시대에 효과가 있었던 논리를 악용하는 것이다. 일단 인륜을 중시하는 유가가 당대에 주류가 되자,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 붙이면서 사익을 취한 것이다. 


과학기술이 서구에 뒤처지기 시작한 조선시대 중반 이후 백성들은 삶을 개선 시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치, 경제, 사회, 기술적인 혁신에는 완전히 무관심 하고 예송논쟁 같은 삶과 유리된 헛짓거리만 했다. 그 시대 예송논쟁을 근대의 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인재를 소모한 미친 짓이었다. 그렇게 조선을 인재를 잃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유가의 실패는 유가의 실패로만 끝나지 않고, 조선의 실패가 되었다. 그리고 엇난간 성리학의 잘못된 관행은 이 민족의 제 2의 본능이 되어 민주주의를 좀 먹고 조직문화의 병폐가 되어 버렸다. 

결국 에고의 사람, 욕심의 사람이 해체 못하는 완벽한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특정 논리가 절대화 되면 그들은 거기에 붙는다. 유가의 특정 논리가 절대화 되면 또 거기에 붙어서 그들은 사익을 추구한다. 특정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면 거기에 편승하고 사람들의 삶과 상관 없이 그 논리를 사익에 위해서 이용한다.

절대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정치권력에 의해 특정 사상과 논리를 절대화 하면 현실 세계에서 이는 절대적 힘이 된다. 그리고 그 사상, 또는 종교는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권력과 야합한 종교는 매우 위험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서 정도전은 정치적 힘을 추구했다. 유가의 이상에 따라 조선이 세워지자 조선은 유가의 논리를 절대화 했다. 그리고 일단 유가의 논리가 절대화 되자마자 유가의 논리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유가의 논리에 대항하는 불가의 힘이 남아 있었던 시기 세종, 세조 때에 유가의 개혁적 성격이 더 강해다. 그 이후는 균형을 잃어 버린 추락의 역사이다. 균형추를 스스로 차 버렸고 스스로의 생각을 우상화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모두를 제대로 실행하기 어려운 것처럼 한 그룹이 모두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사이의 균형은 필요하다.  반대 세력은 우리를 위한 또 다른 균형추이다. 

스스로를 그리고, 자기가 믿고 있다는 논리를 절대화 하지 말라. 다양성 속에 반대자가 있어야 완전해 진다. 일단 절대화 하면 절대 권력이 주어지고 그곳은 금방 환자들 악의 트리오인 악성 나르시스트, 소시오패스,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놀이터가 된다. 그러면 끝이다. 

제도 종교의 구조적 문제

종교적 명분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아주 쉽다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세력이 생긴다.

사람이 모이면 사람들은 본능처럼 조직을 만든다. , 강자와 약자의 지배 질서를 생긴다. , 계층 구조가 만들어 진다면 계층 구조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사람들의 숫자가 야기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조직이 커지면, 그리고 조직의 엘리트의 숫자가 인간적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 숫자가 많아진다. 조직 엘리트등의 피라밋은 거대해지고 전문 엘리트들은 그들만의 아젠다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전체의 이익과 엘리트의 이익이 충돌이 된다. , 대중 그리고 조직을 지탱하는 조직원들의 이해와 조직 지배자들의 이해가 상충되기 시작한다.

종교라도 예외는 없��. 아니, 종교가 더 심하다.

제도 종교가 문제이다. 제도 종교에는 종교 엘리트가 존재한다. 결국 이들의 이익은 종교가 생겼을 때의 근본적 가르침과 배치된다. 종교의 조직 이유와 충돌한다. 종교가 조직화 되고 전문화 되면 될 수록 하부 구성원들과의 권력 거리는 더 커지고 정서적 교감과 공감은 불가능해 진다. 


종교 엘리트의 권력은 이러한 난센스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종교 엘리트의 권력과 이들의 이익 추구는 종교적 가르침에서 제도 종교가 완전히 이탈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 종교가 정치화 상업화 하게 된다. 그게 2000년 전 유대교의 문제였고, 이 시대 기독교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권력과 세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하나님 나라 기독교라는 종교화 되다가 결국 제국의 제도 종교가 되어 버렸다. 제국 제도 종교는 조직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개인이 선하고 착하고, 영적이고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되면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소외가 발생하고, 정치가 득세하게 되어 있다. 이는 법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은 비 종교화에 있다.  교단이라는 중심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 나라 운동화에 머무는 것에 있다. 종교적 엘리트가 지배하는 종교 조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에 있다. 영적인 존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독점적 정치권력, 지배적 경제 권력을 비판해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배타적인 종교 권력의 울타리를 높이고 이웃과 정서적으로 멀어지게 만드는 귄위의 피라밋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주류 기독교와 아나뱁티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충돌하는 포인트가 있다.

지배자를 위한 지배이념 제국종교의 오염

공자의 유교는 대다수를 위한 이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배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지배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세계의 질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이념이다. 

성리학의 나라조선 후기의 맛이 간 성리학은 서인 노론들을 위한 지배이념이 되어 버렸다. 국왕도 민중도, 상공인도 모두 유가를 위한 딱 가리일 뿐이다. 

사회적 질서가 와해된 전국 시대에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논리로 유가의 이념은 효용 가치가 있었는지 모른다. 

유가의 논리에 따르면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도 없고, 상공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들의 경제적 이익 보호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이끌기도 어렵다. 유가의 핵심 논리에서 파생된 사농공상의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를 조직했다. 즉, 유가들 스스로인 선비들을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둔 것이다. 그 논리에 따라 종교화한 기득권화한 서인들은 국가 발전을 심각하게 저하고 약화 시킴으로 근대화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조선이 맥 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유교에 오염된 국가의 사람들인 시민이 되기 어렵다. 그들은 주체적인 시민이 되기 보다는 자기 책임을 포기하고 왕의 보호와 돌봄을 바라는 백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유교를 포함한 종교를 가장한 지배자를 위한 이념의 독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원래의 메시지 부패가 개입되어 있지 않는 누룩 없는 가르침을 복원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경우 양반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화한 유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하이브리드인 서구 기독교의 지배이념의 독까지 더해져서 더 어려운 지경이다. 

연구에 의하면 노예를 가진 지역에서 지배자들은 노예들을 분열시키고 자유인들이 노예에게 연민을 품지 않게 하려 한다. 그 결과 대규모 노예제 산업이 지배하던 곳에서는 사람들간의 아사비아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유교에서는 말도 안되게 대부분이 소시오패스들인 왕들을 아버지로 모시라는 미친 가르침을 전한다. 그래서 왕과 스승(대부분 유가)의 패륜과 전횡, 강간질에 무력하게 당하게 만든다. 그 결과 유교 사회에서는 시민 혁명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자연스럽게 전근대 사회의 정체 속에서 서양 세력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서학을 연구해서 동학의 기치를 내세웠던 이들은 사람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주나라 이전의 이념을 내세웠다. 그래서 천자, 아버지로서의 왕과 스승이라는 이념적 울타리를 깨부숴 버��다. 동학은 자긍식심 가득찬 민중을 만들었고,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 자기 안에 있고 믿는 민중은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 혁명으로 돌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