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으로 세워지는 천국과 사역적 비전으로 파괴되는 천국의 관계

&2/10/2014 11:21:07 AM

천국은 사귐으로 시작되고 공동체는 사귐으로 세워진다. 천국은 사역적 비전의 탈을 쓴 종교적 야망 때문에도 핍박 받는다.

종교는 사역적으로 비전 또는 신념으로 시작된다. 사역적 비전 또는 신념으로 모인 사람들은 결국 사역적 비전 때문에 흩어진다. 사역적 비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흩어지고, 사역적 비전이 성공했을 때에 새로운 사역적 비전이 나타나다. 자동적으로 자기가 본 이념적 비전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시작됨에 따라 분리가 시작된다.

이념적 비전으로 뭉친 이들 사이에서는 사귐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사역적 비전이 이끄는 관계는 이념적 비전을 위한 효용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본다. 효용성이 떨어졌을 경우 관계는 멀어진다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에 부합하지 않으면 서로 배제하고 탄합한다. 

공공의 이익,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념적 비전처럼 보였던 것은 개인적 야망으로 쉽게 변질이 되기 쉽다. 사역적 비전은 쉽게 이념적 야망이 된다.

개인적 야망이 된 이념적 비전은 우상이다. 주위의 어느 누구든 사역적 비전을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허울이 씌워진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에 홀린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애지 중지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이용할 대상으로 보기 쉽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이런 방식으로 계몽주의적 인간은 파괴적 존재가 되기도 한다. 교만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사귐이 되는 사람을 찾아 사귀고 사랑하라.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듣기를 원할 때에 사귐의 틀안에서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다.

 

사역적 비전이라 이름하는 에고의 야망이 투사하는 우상이 세워지면 결국 세상적 관계가 나타난다. 우상을 위한 제사장이자 폭군이 있고, 종교적 허울에 속은 가련한 희생자 그룹이 존재하게 된다. 무지와 아집화한 종교가 하느님의 나라를 대체했을 때에 이 일이 일어난다.

공동체를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를 사역적 비전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이들은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공동체들이다. 다른 공동체는 경계하고 경쟁해서 복속시켜야 하며 심지어 사라져야 할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모든 것은 에고의 놀음일 뿐이다.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가장 반가워 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하나남 나라의 관계 곧 공동체 안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짐을 같이 지는 동역자이다. 다른 공동체 역시 하나님이 세운 나라이고 백성이며 형제로 여긴다. 즐거히 사귐을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에고를 의해서 에고를 위해서 에고를 통해서 살고 일하지 않는다. 그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heaven-based-on-love-vs-ministry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기

[Msg507] &6/28/2011 8:25:11 AM

후터라이트 친구들을 만나면 특이한 점이 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말씀에 명명백백하게 나온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는 에고의 자존심 때문에 거부한다. 또는 대담하게도 상황논리를 갖다대고, 현실론을 들이댄다.

그들 후터라이트, 아미쉬의 표현대로 우리의 마음은 High Mind이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높은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가 물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 중 다수는 빌라도와 같아서 왜 빌라도가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마음이 높은 자들이다. 우리의 에고로 진리를 판단하려 한다.

세속에 찌든 우린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다. 빌라도처럼 자아를 동원해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시대는 인간 에고 지배의 시대이고 소위 크리스챤이라는 사람들도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시대이다. [ 3:19, 16:18] 그러니 어떻게 진리에 정직하게 반응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진리를 통해서 자유로워 지는 것은 아니다. 돼지와 개에게 안된다. 오히려 진리를 전한 사람도 위험에 빠뜨리고 자기들도 더 큰 죄를 짓는다. 이들은 결코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이 분류에 들어갈 것으로 믿는다.

마음에 간사가 없이[ 1:47, 32:2]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정직한 길을 찾���야 할 이유가 있다. 다림줄

빌라도와 대응되는 자가 백부장이다. 둘다 같은 이방인이다. 각각 이방인의 나쁜 모델과 좋은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따라 이성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재단하려 했다. 에고의 왕좌는 굳걷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를 에고의 오만함을 만족시켜주는 치장품이 될 뿐이다.

백부장은 진리에 순복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진리는 분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닥치고 듣고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 권위의 진실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간사가 없는자가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요 1:47] 주님은 복잡한 마음과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제자로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단번에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을 제자들로 받아들였다.

진리의 진리됨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에고에, 이성에 있지 않는 것 같다. 그 이해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 곧 직관적 영감에 의해서 온다고 여겨진다. [고전 2:4]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직관적 이해와 즉각적 순종은 에고를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임하는 신적인 능력이다.

하급 직업 군인이며 순결하고 단순한 백부장은 투명한 눈으로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옳바른 태도, 곧 최고의 믿음을 보여 주었다. ,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닥치고 순종하는 것이다.

 , 그는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는 구원의 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being-honest-about-the-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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