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노동자의 손

&2/18/2014 9:12:01 PM 

2008년 여름 후터라이트를 처음 방문했다. 미국에서 아미쉬를 방문했을 때와 달랐다. 아미쉬는 Community of Goods까지는 가지 않았다. Partial Community라고 할 수 있다. 후터라이트는 Community of Goods을 실행하고 Full Community를 실행하고 있었다. 아나뱁티스트 그룹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그룹이었다. 아나뱁티스 그룹 중에서 가장 가혹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가장 최근에까지 순교자가 나왔다. 최근에 (20세기 초) 미국에서 순교자를 내고 캐나다로 이주해온 그룹이다.

이런 사전 지식 때문에 조금은 긴장되었다. 사전 지식에 의하면 이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람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동안 그 안에 머물면서 그들을 참으로 사귀기 시작하자, 요한일서에 기술된 사귐의 실재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저녁 늦게 퍼스트 미니스터가(목사로 이해할 수 있으나, 이들의 일이 우리가 아는 이 시대의 일반적 목사의 Job Description과 다르기에 후터라이트가 쓰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노동을 끝내고 우리와 성경 얘기를 했다. 그는 야채 밭 담당이었다. 야채 밭은 여름이 제일 바쁜 것 같다. 저녁 늦게야(때로는 새벽 0, 보통은 밤 10) 그의 일이 끝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대신에 겨울에는 일이 없다. 그래서 겨울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어떻게 순종할 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중에 그는 방에서 오래된 성경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 성경을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낡은 성경과 노동에 찌든 그의 손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낡은 성경은 조상들의 믿음을 이어온 고난을 보는 듯했고, 노동에 찌든 그의 손은 순종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치렀던 후터라이트 형제들의 처절했던 삶과 역사를 증거하는 듯 했다.

말씀을 붙들고 있는 노동에 단련된 손!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내가 무엇을 보려고 여기에 왔나? 부드러운 옷을 입을 사람이었나? 고운 손에 금박 입힌 성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나? 고학력과 도시 중산층 교인의 세련됨이 묻어 있는 사람이었나? 이들은 내가 있었던, 서울, 뉴저지, 토론토 등에 있다.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제자들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先知者)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先知者)보다도 나은 자()니라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순종함으로 회개하고 하늘나라의 질서에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왕국 안에서 살기 위해 고난의 삶을 선택하고 거친 노동을 마다하지 그 손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여기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 곳이다.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온 삶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여기는 도래한 하나님 나라이다. 이 나라가 성장하기를 바란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4

고립된 초월적 경험이 아니라 성육신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

&2/17/2014 12:07:02 PM

고립적 명상은 자위 행위를 닮아 있다. 베드로의 초막은 나르시시즘적 이탈이다. [마 17:4]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홀로 즐거울 수 있는 길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곧 성육신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적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은 사랑의 안에 있고, 사랑은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고립적이고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르심은 동행이다. 천상 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를 향한 부르심이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친 짓을 그만 두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 [요 15:12]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헌신으로 즐거워하라. [요 15:11] 이게 예수의 길을 따른 자의 ‘도’이다.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한 손길, 배려의 말, 섬김을 통해 남편 또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른 길의 그림이다. 혼자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적 즐거움은 건강한 기쁨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기쁨은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안에 있다.

결국 사랑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 가야 할 길이다. 존재 자체가 다른 이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 사적 이익과 계산이 개입되지 아니해야 한다. [마 5:46~47] 아버지처럼 사랑을 은혜로 베푸는 자체를 기쁘게 여기는 사랑의 존재가 될때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 5:45

하나님은 사랑이다. [요일 4:8]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푼다. 그래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춘다. [마 5:45]

참 사람의 참 기쁨은 사랑 안에 있다. [요일 1:4, 요 15:11]

술이 잠시 기쁨을 주고, 마약에 환락에 취하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중독되면 건강하지 못하다. 자위적 기쁨이고, 자기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얻고 풍성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사랑이 선하고 아름답다. [요 10:10]

영적 수련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자기 자신의 구원과 기쁨만인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자기를 향한 자기 사랑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의 훈련과 즐거움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 [약 1:27]

더불어 즐겁고 천국 안에 있기 위해서는 사랑의 봉사와 섬김이 뒤 따라야 한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노동의 즐거움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본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누리고 생명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형제자매의 관계 안에서 형제 자매를 위한 노동과 섬김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이것이 육과 에고를 거슬러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 있는 육체를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롬 12:1]

자신을 드려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즐기는 행복을 누려라. 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이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지옥과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노예 삼고자 하는 곳이다.

천국적 삶의 방식을 내면화 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적 삶이 형태나 나타나게 된다. 이들의 삶의 내용이 이 땅에 임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 중 하나이다. 

더 이상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가 공동체이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바쳐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자 공동체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isolated-mediation-and-the-dangers

십자가를 둔 싸움, 하나님 나라와 바벨론

&080820140300

개인주의자들, 또는 세련된 이기주의자들은 십자가를 볼 때 거기서 사적 안식과 위로만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선적 관심이 이생에서의 복, 사적 구원과 행복, 영생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웃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기 희생이라는 십자가의 원칙을 통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질서에 복종시키고,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 나아간다. 

본질적으로 기관으로서의 제도 기독교는 현실 안주주의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본능적으로 영적 영역과 세상적 영역을 구분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자기 희생 없이 안락한 영적 현실 안에서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구지 타락한 세상에 성육신 해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쓰고 고통을 관통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현실안주주의적인 행복을 위해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만한 만만한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이다. 세상에 대해서 위협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하늘 나라와 이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질서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이미 왔고 그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대가로 지불함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찾고 부르고 제자로 세우신다. 하나님 나라의 돌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모세가 이집트 왕자의 신분을 버렸다. 그리스도의 이후의 수 많은 제자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처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기 위해 투자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다. [Hebrews 11:38]

그리고 세상은 이들이 살기에 합당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중에도, 좋은 집에도 있지 않는다. 이들은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거하 기도 한다. [Matthew 11:7 ~ Matthew 11:9] 때로 세례 요한 때에 엣세네파가 그렇게 한 것처럼, 선지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이들은 세상과의 대립, 긴장 때문에 분리되어 광야에 거한다. 역동적인 이들의 믿음과 운동이 이들을 광야로 몬 것이다. [Hebrews 11:38]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ight-to-put-up-the-cross-babylon-and-the-kingdom-of-god

Calendar

<<  November 2018  >>
MonTueWedThuFriSatSun
2930311234
567891011
12131415161718
19202122232425
262728293012
3456789

View posts in large calendar

RecentComments

Comment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