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노동가치설

&2/20/2014 4:50:19 PM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이후 아담 스미스가 설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설명을 한 맥락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상인계급의 불의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경제 이념은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였다. 상인들은 중상주의의 논리에 따라 상업을 보호하라고 국가권력에 개입하여 권력을 조정하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상주의 논리로 그들 상업권력을 위한 불공정 경쟁 체제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주장했다. 자유로운 공정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체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강자의 불공정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논리로 보이지 않는 손이 강조된다. 예수님처럼 아담 스미스도 기득권의 수호자로 강탈되어 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아담 스미스의 명성과 그의 아이디어는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대자본이 자유롭게 불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앞세워서 정글 자본주의 또는 해적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소수 부자와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도 중농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바늘공장의 비유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는 조직된 노동력이 결국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기술도 새로운 생산방식도 결국 훈련되고 조직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포드이즘의 컨베이어 시스템도,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도, 반도체 개발도, 인터넷 혁명도 사람, 곧 훈련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개별적 노동력이 잘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조직되지 않고서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문제는 노동의 조직에 있다.

불행히도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스스로 조직하고 초기의 위험을 감수할 재정적 심리적 역량이 없다. 때문에 결국 조직화되고 훈련화된 노동이 창출할 수 있는 부는 노동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개별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자들은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의 부품이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생산성 혁명은 있었으나, 공평치 못한 부의 분배로 더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이전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자금이 있다먼저 당장의 재정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 생산체제는 자본가의 몫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이 없는 노동가들이 기술이 있어도안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결과가 좋을 경우 재주는 노동가가 부리고 가치생산 체제의 소유권을 가진 자본가와의 분배의 게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소자본 창업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 노동자는 월급이라도 챙기지만, 창업자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자본이 없는 다수는 노동자의 길, 봉급쟁이 삶을 선택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가치를 창출한 노동력에 더 많은 부가 배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탐욕을 미워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 곧 자본가들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노동자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가는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뭉치하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자본가가 조직한 개별 회사 내에서 파생된 조직이다.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가 있고 난 다음에 파생적으로 그 회사의 노동조합이 있다. 파생조직이기에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공산주의 이상을 보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려 하고, 신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쓰고, 증오와 투쟁의 희생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증오와 투쟁을 심어 주는 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옳았지만, 불의를 해결하는 에너지를 불의를 만든 에너지에서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기 쉬운 우울하고 안타까운 운동이었다.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불의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보다는 나아 보인다. 무책임하게 역사적 책임을 방임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적 불의에 저항한 이들 때문이라도 우리의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00년전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등장했을 때에 지배체제에 위협이 된 것은 후터라이트 노동자들이 중세의 농노처럼 토지를 가진 지주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를 통해서 노동을 조직화 했다. 그들의 사회안에는 영주, 지주와 같은 폭력과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인 지배계급도 없었다. 자본가와 같이 축적된 자본의 힘을 지렛대로 다수를 지배하고 하는 자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되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영주도, 기사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자치를 했다. 자본가들의 자본 없이 노동을 조직했고,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조직화된 노동에 기초한 부를 창출했다.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잘 사회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지속시켰다.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아나뱁티스 그룹이 한 때 구교 신교 보다 많았었다고 한다. 가혹한 박해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달라 졌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무장 혁명론자들이 갖고자 하는 국가폭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고도 공산주의를 실행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의 에너지가 아닌 자기부인과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었다. 즉,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지배한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동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주, 지주 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가톨릭과, 신흥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폈던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터라이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후터라이트들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체제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될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리더들은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아나키즘이 유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유럽은 붕괴되고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지주나 자본가 주도하는 지배와 종속관계라는 사회적 틀에 대중들이 복속되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라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룰지라도 반드시 이를 선택을 하려 저항하고 투쟁할 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치적 공동체라는 대안의 존재, 당시에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를 세상에서 없애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12개 그룹 이상 되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 대부분은 사라졌다. (지금은 3개 그룹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마저 지우려 했다. 이제 역사의 계절이 바뀌어 3개, 7개, 12개 이상의 자발적 아나뱁티즘 그룹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아나뱁트스트에 대한 적대감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처럼 이들이 배척당하고 죽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죄명은 예수님처럼 반역죄였다. 정치적 죄였다. 아나뱁티스에 대한 대학살 사태를 일으킨 드러난 명목은 종교적이었다. 더 깊은 곳에는 정치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내적으로는 이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라 본다. 

라카츠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립한다. [세상과 대립 발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디서나 이 두 세력은 서로 싸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 그러나 조직화고 훈련된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노동자가 누리기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를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조직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연대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몫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먼저 리스크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노동력 조직화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자기가 대고 리스크를 먼저 지기 때문엔 분배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갈등이 근대 세계를 이끌어 왔다. 2012는 협동조합의 해라고 했다. 이제 피가 흥건한 근대를 마무리를 하고 협력의 시대를 열 때가 아닐까?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모델이며, 증명된 모델이다. 후터라이트는 500년여년 이 방식으로 살아왔다. 즉, 500여년 이상의 세월로 증명된 삶의 모델이다. 

공동체, 또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본가에만 집중된 부가 편중된에 현실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슬퍼하고 그에 따른 불의를 분노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타도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온다. 외부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내부를 향하고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극이다.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킬링필드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동경대에서도 이 일이 일어났다. 

먼저 자기 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와 같은 죄가 악한 구조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때문에 들보를 빼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위탁하고 헌신함으로 세상이 질서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한다고 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communities-and-labor-theory-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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