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

민주주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흐름 중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본 목표는 계급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왕의 제도를 돌이키는 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 흐름과 같이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왔다. 무릇 모든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함으로 하나님 나라 있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운동에 헌신함으로 이웃 사랑의 길의 정도에 서 있을 수 있다. 

예수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정치경제적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제국을 붕괴시키고, 국가를 전복하는 차원에서의 정치투쟁은 아니었다. 

개인을 존재 상태를 혁명하고, 변화된 개인들의 연대인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서 왕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무는 세상으로부터 종속성을 벗어나기를 결정하고 변화된 이들을 위한 양의 우리를 만들고 양들을 치는 것이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가장 큰 장애는 제국이었다. 늘 제국은 교회 공동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이려 했다. 500년 전의 아나뱁티스트를 이 땅에서 지우려고 했던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계몽 시대 이후 변화가 생겼다. 민주주의 국가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핍박은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국가는 지배자의 폭주를 통제하기 위한 법체제, 지배자들이 마음대로 조세를 겆지 못하게 하는 조세 법률주의 등을 내포하고 있다. 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일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기반한 헌법과 법의 지배는 상식의 지배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핍박이 현저히 줄어 들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양심과 상식에는 하나님의 뜻이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부분에서 먼저 진도를 나간 미국으로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가 이주를 했다. 현대 아나뱁티스트들의 고향이 펜실베니아가 된 것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최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악을 방지하는 것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힘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면 힘 있는 사람들은 법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하기 보다는 사회적 강자의 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 전진해야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각성된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 곧 다양성과 자유를 존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에 의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내재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악의 폭주를 막는다. 이는 사회적 틀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우리들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시민들을 키워내는데 공헌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성이 꽃피는 최선의 사회를 아래로부터 만들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교회 공동체는 초대 교회처럼 Community of Good을 지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주, 협력, 연대, 공생의 기초 사회를 하나씩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공동체 밖의 개인주의 사회와는 다툴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적 법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교회 공동체 내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이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보호해 주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민주사회는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는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는 사회와 끊임 없는 갈등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인주의로의 성장과 민주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사회적 인구의 대다수가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다수가 동참 가능한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개인의 인권이 존중 받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비전은 이 너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공헌을 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실행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한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허무주의

그라쿠스 형제는 결국 살해 당했다. 순수했던 조광조도 사약을 마셔야 했다. 광해가 축출되고, 소현은 독살되고, 정조는 암살 당했다. 현실 세계에선 늘 소시어패스 그룹이 승리했다. 그들은 살인,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상주의적 가치 때문에 방법에 있어 스스로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폭력적이고 위력적인 무기를 제한 했다.

70년대 낭만주의 건달도 사시미 사용을 마다 않던 자들에 의해 끝나 버렸다. 주먹이 약한 것이 아니라 더 치사하지 못해서 더 야비하지 못해서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정치적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악랄한 수법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이긴다. 결국 무자비한 경쟁이 있는 곳은 늘 소시오패스의 놀이터가 된다. 

따라서 정쟁을 통해서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쟁의 장은 사이코패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장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경기장을 게임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

거짓에 속한 이들이 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혹 침투를 하더라고 그들의 게임을 시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투명성이 요구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가 그 사회이다.

반대로 현대 대도시와 정치권, 거대 기업, 각종 거대 기관, 그 중에서도 종교기관은 거짓의 사람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놀이터이다. 이 곳에서 가치에 헌신하는 진리의 사람들이 손발이 묶인채로 이기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즉, 승리는 매우 드물고 비 현실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일상에서 늘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악을 이기려 하면 결국 악한 방법에 중독될 수 밖에 없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쓸수록 악해진다. 혹 그렇게 해서 악한 세력이 물러가도 세상은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악에 물들은 또 다른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운영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허무하다. 

악을 이기는 길은 단순히 악하게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만의 선한 길을 찾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악을 그들은 그렇게 살게 놔두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을 수도 있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의 원리에 따른 공동체로 살면 된다. 그게 모두가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 

정치는 허무한 짓이다. 시시포스의 헛된 노력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무해 보이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정치에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유토피아에 대한 비 현실적 정치적 약속과 민중의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기대는 재앙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환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약속의 명분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광기의 살인자가 되었다. 


유토피아를 약속한 거의 모든 정치적 엘리트의 약속과 민중의 허망한 기대는 결국 커다른 비극과 절망적인 폭정의 야기시켰다.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서 결코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했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거대할 수록,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강할 수록 과도한 정치권력 남용과 무자비하고 광범위한 폭력이 수반되었다. 정치는 허무하다. 


그러나, 풀뿌리 단계에서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가 할 일이 있다. 곧 최악을 막는 것이다. 그게 정치가 할 일이고, 정치의 한계이다. 그래서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이라서가 아니다. 민주주와 함께 사회적 부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한 풀뿌리 운동의 전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허무하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시시포스의 비극과 닮아 있다. 정치적 사상을 믿고, 정치적 엘리트에게 권력을 줌으로써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기 책임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내 주변은 세상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선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는 자기 수련 및 자기 수양 운동이기도 하다.

동시에 스스로를 혁명한 이웃들 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가 바꿈으로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일상 속으로 풀뿌리 단계에서 먼저 다가온다.  

이는 정치적 상부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부구조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기반체제의 변화를 야기하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영적인 정치운동이다. 

사회 기반체제 변혁 풀뿌리 운동과 동시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이는 풀뿌리 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정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사회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풀뿌리 운동을 짓밟는 정치적 과잉을 야기하는 정치 만능주의와 함께 풀뿌리 운동을 위한 사회적 환경 조성을 좌절시키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교만과 시기심라는 지옥, 겸손 속의 천국

&3/11/2014 11:07:14 AM

90년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클린턴 정부의 IT 권장 정책으로 미국의 IT 분야는 돈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미국 IT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이 미국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장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한국 가게를 들러야 했다. 그 동네 신출내기였기에 인사를 해야 했고 소개를 해야 했다. 여기서 낯선 감정들을 경험했고, 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균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만 접촉할 수 있었다. 사는 동네가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의 복잡 다단��� 심리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계급 상승을 추구한다. 교포 사회에서 이민 1세들의 꿈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Msg15]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들이 꿈꾸는 주류 사회 진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부러움이 있었고, 질투가 보였다. 

교포사회 사람들은 흔히 못사는 흑인 동네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흑인들은 보통 장사를 잘 하지 않는다. 동네가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백인들도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꺼린다.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도 이 점을 알고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 시작해 성공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인이나 유대인이나 무주공산을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해서 재정적 성공을 한 점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공한 이후 성공을 누리고 관리하는 방식이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의 다른 점이라 한다. 

성공을 하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부유한 백인 교외 지역으로 이사하고 낡은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주급과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랑스럽게 BMW, 벤츠, 렉서스와 같은 고급 차를 몰고 출근한다. 이 차를 당당하게 가게 앞에 주차함으로써 자신들이 최근에 획득한 경제적 신분을 과시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즐기고 자신의 상처입은 열패감을 만회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들이 비참한 느낌을 들게 함으로 얻는 더러운 만족감을 즐긴 것이다. 한국인들 끼리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하던 비교 질 자랑 질 버릇이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새는 박아지가 미국에서도 샌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랑 질이 시작이 되면 조만간 그 가게가 흑인 강도에 의해 털린곤 한다고 들었다. 흑인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기들 주머니를 털어서 부자가 되었음에도 흑인들과 친구가 되어 흑인 사회에 공헌을 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차부터 바꾸고 이웃인 흑인들로부터 스스로 분리 구분하고 거만하게 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이렇게 저렴하게 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한국들의 삶과 성공에 대한 동기가 멸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활한 유대인은 성공한 이후에도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 몰던 낡은 차를 몰고 가게에 간다고 한다. 비록 집은 멀리 교외 지역으로 이사 했어도 가게에 출근 할 때에는 옷도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 있는 고급 차는 절대로 가게로 몰고 가지 않는다. 흑인들이 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끔, 그리고 유대인 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에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온몸으로, 태도에서, 차에서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오만한 길로 살다가 흑인들의 사회적 분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행히 이제는 교포 사회는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졌다.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한국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안의 반사회적 또는 반공동체적 요소는 이렇게 다른 문화와 비교하고 접촉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경우 2,000년 전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고 방랑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다수 이방인에 둘러 쌓여 있는 삶이었다. 유대인이 가난하던, 부자던 이는 쉬운 삶이 아니다. 가난하면 무시하고 차별 당한다. 부자이면 질투하고, 심하면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흑인 사회와 노골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를 획득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경우 아직은 어설프다.

우리 모두 안에 자신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파괴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이들이 실패하는 것을 봐야 만족이 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유대인은 잘 이해하고 처신하고 있는 듯 했다.

펜실베이니아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다른 주의 한국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교회 주차장에 벤츠, BMW, 렉서스, 아큐라가 많은지! 사람들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지, 수입의 규모가 어떤 지를 아는 나로서는 황당한 그림 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겪는 사회적 좌절감을 교회라는 사회 속에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고 좌절된 그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보상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병든 마음 상처 받은 자존심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안타까웠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고 펜실베니아 웨스터체스터 카운티에 살았었다. 바로 옆이 랭커스터 카운티였다. 우리는 웨스터체스터와 랭카스터 카운티 경계에 살았었다. 우리가 가는 월마트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었다. 이들이 아미쉬였다. 우연히 우리는 아미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들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나뱁티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 중 하나를 가게 되었다. 한국 교포 교회와 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가장 눈에 뛴 차이는 자동차였다. 고급 차가 하나도 없었다. 반짝반짝한 최신 중형차도 없었다. 차들은 대부분은 낡고 겸손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고급 명품을 걸치지 않았다. 명품 전시장이었던 한국인 대형 교회의 모습과 판이한 차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지에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Plain People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이 Plain People이라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게 한 내적 기반을 이해하자,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은 Plain People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묶이지 않고, 노예가 되어 죽기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외적 표현이 그들의 자동차였고, 옷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우리는 한참을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예배 후 약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외에 아무도 교회를 떠나기 위해 주창장으로 나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아무도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개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처럼 같은 집단 내의 이웃을 패배자(Underdog)로 만들어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칭찬하는 시녀와 팬클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웃을 딛고 일어서서 내려다 보기 보다는 오직 위로만 향하는 야망의 길에서 내려와 다들 교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를 안부를 궁금해 하고 겸손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봤다. 당시 나는 고연봉 자였다. 아큐라라는 혼다 고급차 브랜드를 몰았었다. 다음에는 렉서스나, BMW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정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흔한 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생각 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이고, 비난 받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운 삶의 방식임을 보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사탄의 생각,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생각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를 방문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쪽 팔렸다.

그 이후 우리도 자발적인 아나뱁티스트가 되어서 그들처럼 스스로 Plain People이 되어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즉, 다른 이들의 세상적 성공을 질투하지도 않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어떠함을 차나, 집, 옷, 사회적 지위, 학위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교만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부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세상적 성공을 Show Up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처럼 Plain People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천국을 보았다. 서로가 은밀히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멸시하거나 남몰래 비참해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누가 잘나가지는 가지고 관계의 긴장이 없었다. 누가 더 잘 낫는지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낮아지기로 결정하고, Plain People 중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자 평화가 있었다. 거기에 천국이 있었고 참 공동체적 관계가 있었다. 

경계선 소시오패스의 시대

&2/15/2013 5:00:42 PM

이 시대에 소시오패스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 사이코패스 보다 위험한 것이 소시오패스라 한다. 사이코패스와는 달리 이들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이 시대 사회는 소시오패스를 양산하는 사회인가 보다.

소시오패스가 되기 전에 사람으로써 건강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계성 소시오패스가 많다는 얘기이다. 이 시대는 공감 부재의 시대이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려 하고 있다. 자신들의 낭비와 사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래에 후손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바꾸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미비하기만 하다. [748.p11.3Bt]  공감 부재의 시대이고, 공감 부재의 인간들이 지배적인 시대이다. 

후손들은 이 시대를 경계성 소시오패스의 시대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친족 공동체에 살던 남수단에서 온 소년과 같은 사람들만이 우리들의 병적인 상태를 인식할 수 있다. [748.p48.4Cb, 748.p49.2Ct] 왜냐하면 모두가 같은 병에 있다. , 이웃의 고통과 기쁨에 삶에 무심하고 공감이 없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밖에 없는 도시인으로 살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era-of-borderline-sociopaths

양심이 가진자가 90% 이상인 이유

&3/2/2013 11:39:19 AM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거대 도시 사회에서는 양심을 가지지 않은 소시오패스 같은 부류가 승자이다. 그래서 거대 도시에서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환경의 영향 하에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각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포함한 게임의 법칙에 의하면 결국 배신자 전략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늘 이긴다. 그래서 이들만이 자손을 남길 기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 양심을 가진 인류의 특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부당함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그래서 부당함에 저항하게 만들다가 쉽게 비명 횡사하게 만든다. 이들이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자본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이들은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비참한 가난의 상태에 빠지고, 소시오패스 기회주의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자본을 누린다. 한국의 경우 거대 족벌 언론들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라는 사회적 자본의 혜택을 누리면서 권력을 횡사하는 것과 같다.

기록된 역사에는 늘 이런 게임이었다. 양심을 가진자는 비명횡사가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하고 번영한 이유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서 배신자들 사이에 있으면 이들은 소시오패스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연대해서 공동체를 이루면 게임이 법칙이 달라진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역사였기에 양심을 가진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자본주의는 소시오패스를 위한 체제이다.

따라서 공동체 복원은 인류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consciences-shared-by-the-90

Calendar

<<  October 2018  >>
MonTueWedThuFriSatSun
24252627282930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1234

View posts in large calendar

RecentComments

Comment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