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시기심라는 지옥, 겸손 속의 천국

&3/11/2014 11:07:14 AM

90년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클린턴 정부의 IT 권장 정책으로 미국의 IT 분야는 돈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미국 IT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이 미국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장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한국 가게를 들러야 했다. 그 동네 신출내기였기에 인사를 해야 했고 소개를 해야 했다. 여기서 낯선 감정들을 경험했고, 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균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만 접촉할 수 있었다. 사는 동네가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의 복잡 다단한 심리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계급 상승을 추구한다. 교포 사회에서 이민 1세들의 꿈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Msg15]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들이 꿈꾸는 주류 사회 진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부러움이 있었고, 질투가 보였다. 

교포사회 사람들은 흔히 못사는 흑인 동네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흑인들은 보통 장사를 잘 하지 않는다. 동네가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백인들도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꺼린다.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도 이 점을 알고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 시작해 성공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인이나 유대인이나 무주공산을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해서 재정적 성공을 한 점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공한 이후 성공을 누리고 관리하는 방식이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의 다른 점이라 한다. 

성공을 하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부유한 백인 교외 지역으로 이사하고 낡은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주급과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랑스럽게 BMW, 벤츠, 렉서스와 같은 고급 차를 몰고 출근한다. 이 차를 당당하게 가게 앞에 주차함으로써 자신들이 최근에 획득한 경제적 신분을 과시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즐기고 자신의 상처입은 열패감을 만회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들이 비참한 느낌을 들게 함으로 얻는 더러운 만족감을 즐긴 것이다. 한국인들 끼리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하던 비교 질 자랑 질 버릇이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새는 박아지가 미국에서도 샌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랑 질이 시작이 되면 조만간 그 가게가 흑인 강도에 의해 털린곤 한다고 들었다. 흑인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기들 주머니를 털어서 부자가 되었음에도 흑인들과 친구가 되어 흑인 사회에 공헌을 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차부터 바꾸고 이웃인 흑인들로부터 스스로 분리 구분하고 거만하게 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이렇게 저렴하게 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한국들의 삶과 성공에 대한 동기가 멸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활한 유대인은 성공한 이후에도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 몰던 낡은 차를 몰고 가게에 간다고 한다. 비록 집은 멀리 교외 지역으로 이사 했어도 가게에 출근 할 때에는 옷도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 있는 고급 차는 절대로 가게로 몰고 가지 않는다. 흑인들이 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끔, 그리고 유대인 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에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온몸으로, 태도에서, 차에서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오만한 길로 살다가 흑인들의 사회적 분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행히 이제는 교포 사회는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졌다.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한국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안의 반사회적 또는 반공동체적 요소는 이렇게 다른 문화와 비교하고 접촉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경우 2,000년 전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고 방랑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다수 이방인에 둘러 쌓여 있는 삶이었다. 유대인이 가난하던, 부자던 이는 쉬운 삶이 아니다. 가난하면 무시하고 차별 당한다. 부자이면 질투하고, 심하면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흑인 사회와 노골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를 획득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경우 아직은 어설프다.

우리 모두 안에 자신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파괴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이들이 실패하는 것을 봐야 만족이 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유대인은 잘 이해하고 처신하고 있는 듯 했다.

펜실베이니아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다른 주의 한국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교회 주차장에 벤츠, BMW, 렉서스, 아큐라가 많은지! 사람들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지, 수입의 규모가 어떤 지를 아는 나로서는 황당한 그림 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겪는 사회적 좌절감을 교회라는 사회 속에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고 좌절된 그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보상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병든 마음 상처 받은 자존심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안타까웠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고 펜실베니아 웨스터체스터 카운티에 살았었다. 바로 옆이 랭커스터 카운티였다. 우리는 웨스터체스터와 랭카스터 카운티 경계에 살았었다. 우리가 가는 월마트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었다. 이들이 아미쉬였다. 우연히 우리는 아미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들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나뱁티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 중 하나를 가게 되었다. 한국 교포 교회와 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가장 눈에 뛴 차이는 자동차였다. 고급 차가 하나도 없었다. 반짝반짝한 최신 중형차도 없었다. 차들은 대부분은 낡고 겸손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고급 명품을 걸치지 않았다. 명품 전시장이었던 한국인 대형 교회의 모습과 판이한 차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지에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Plain People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이 Plain People이라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게 한 내적 기반을 이해하자, 근본적인 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은 Plain People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묶이지 않고, 노예가 되어 죽기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외적 표현이 그들의 자동차였고, 옷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우리는 한참을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예배 후 약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외에 아무도 교회를 떠나기 위해 주창장으로 나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아무도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개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처럼 같은 집단 내의 이웃을 패배자(Underdog)로 만들어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칭찬하는 시녀와 팬클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웃을 딛고 일어서서 내려다 보기 보다는 오직 위로만 향하는 야망의 길에서 내려와 다들 교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를 안부를 궁금해 하고 겸손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봤다. 당시 나는 고연봉 자였다. 아큐라라는 혼다 고급차 브랜드를 몰았었다. 다음에는 렉서스나, BMW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정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흔한 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생각 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이고, 비난 받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운 삶의 방식임을 보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사탄의 생각,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생각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를 방문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쪽 팔렸다.

그 이후 우리도 자발적인 아나뱁티스트가 되어서 그들처럼 스스로 Plain People이 되어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즉, 다른 이들의 세상적 성공을 질투하지도 않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어떠함을 차나, 집, 옷, 사회적 지위, 학위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교만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부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세상적 성공을 Show Up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처럼 Plain People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천국을 보았다. 서로가 은밀히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멸시하거나 남몰래 비참해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누가 잘나가지는 가지고 관계의 긴장이 없었다. 누가 더 잘 낫는지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낮아지기로 결정하고, Plain People 중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자 평화가 있었다. 거기에 천국이 있었고 참 공동체적 관계가 있었다. 

자기 중심적 지성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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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성이 같은 것이 아니다
.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선악과를 먹으면서 열렸다. 창세기를 보면 무엇인 나를 위해 좋은 것이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선악과를 먹기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이 각성되었다. [Genesis 3:6] 성경에 의하면 인간 지성의 시작은 자기 중심성이었기에 인간의 지성은 자기중심적 지성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인간은 자기를 위한 위한 일에는 지혜롭고 이웃을 위한 일에는 미련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지혜는 악한데 지혜롭고 선한데는 미련하다. 그래서 이런 지성은 서로에게 재앙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재앙인 세상이 열린 것이다. 지옥문이 세상을 향해 열린 것이다. [Romans 16:19]

인간의 지성이 이쪽으로 발달한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관심 때문이다. 선한 일에 대해서 단순하고, 악한 일에 대해서 고도로 발달한 지적 체계를 개발시킨 것은 인간의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 시스템에 인간의 모든 지혜의 결정체가 집약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기중싱적 지혜는 무자비하고 거짓과, 편견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자기를 위해 지배 조정하려는 에고의 욕망에 의해 추동 받는 지혜이다.

지혜의 소스는 하늘 또는 영으로부터 오고 세상적 지성의 소스는 자기(에고)로부터 온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자기중심적 지성과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James 3:17]

많은 경우 인간이 자기 중심적 지성이 인격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영적으로 위험하다. 인간 지성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 관점으로 비롯되어 자기중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술이고 계략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종교적 명분, 예배,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자기중심적 지성은 사악하게 이용하려 한다.

자기중심적 지성이 가장 큰 해를 끼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하느님과 이웃과 내적 연대를 스스로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기중심적 지성 중심의 사람들에게 초월적 차원으로에서 유입되는 영적 통찰력을 기대할 수 없다. 자꾸만 그들은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영적세계로부터의 메시지를 차단하고 성령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 지성만 단련하고 꾸미어서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는 낮은 수준의 무모하고 실패가 예정된 노력이다. 율법의 도움과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지 알수 있을 수도 있지만 자기중심적 지성으로는 절대로 하느님 중심적, 이타적 사랑인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 [Romans 7:21, Romans 7:18

사도바울처럼 이를 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하늘로부터의 지혜 곧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선을 행하는데 지혜롭고 악에 대해서는 단순해지는 지혜를 받고, 선을 행할 능력을 받는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presence-of-egocentric-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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