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

민주주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흐름 중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본 목표는 계급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왕의 제도를 돌이키는 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 흐름과 같이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왔다. 무릇 모든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함으로 하나님 나라 있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운동에 헌신함으로 이웃 사랑의 길의 정도에 서 있을 수 있다. 

예수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정치경제적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제국을 붕괴시키고, 국가를 전복하는 차원에서의 정치투쟁은 아니었다. 

개인을 존재 상태를 혁명하고, 변화된 개인들의 연대인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서 왕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무는 세상으로부터 종속성을 벗어나기를 결정하고 변화된 이들을 위한 양의 우리를 만들고 양들을 치는 것이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가장 큰 장애는 제국이었다. 늘 제국은 교회 공동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이려 했다. 500년 전의 아나뱁티스트를 이 땅에서 지우려고 했던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계몽 시대 이후 변화가 생겼다. 민주주의 국가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핍박은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국가는 지배자의 폭주를 통제하기 위한 법체제, 지배자들이 마음대로 조세를 겆지 못하게 하는 조세 법률주의 등을 내포하고 있다. 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일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기반한 헌법과 법의 지배는 상식의 지배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핍박이 현저히 줄어 들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양심과 상식에는 하나님의 뜻이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부분에서 먼저 진도를 나간 미국으로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가 이주를 했다. 현대 아나뱁티스트들의 고향이 펜실베니아가 된 것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최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악을 방지하는 것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힘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면 힘 있는 사람들은 법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하기 보다는 사회적 강자의 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 전진해야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각성된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 곧 다양성과 자유를 존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에 의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내재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악의 폭주를 막는다. 이는 사회적 틀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우리들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시민들을 키워내는데 공헌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성이 꽃피는 최선의 사회를 아래로부터 만들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교회 공동체는 초대 교회처럼 Community of Good을 지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주, 협력, 연대, 공생의 기초 사회를 하나씩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공동체 밖의 개인주의 사회와는 다툴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적 법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교회 공동체 내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이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보호해 주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민주사회는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는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는 사회와 끊임 없는 갈등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인주의로의 성장과 민주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사회적 인구의 대다수가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다수가 동참 가능한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개인의 인권이 존중 받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비전은 이 너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공헌을 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실행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한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허무주의

그라쿠스 형제는 결국 살해 당했다. 순수했던 조광조도 사약을 마셔야 했다. 광해가 축출되고, 소현은 독살되고, 정조는 암살 당했다. 현실 세계에선 늘 소시어패스 그룹이 승리했다. 그들은 살인,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상주의적 가치 때문에 방법에 있어 스스로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폭력적이고 위력적인 무기를 제한 했다.

70년대 낭만주의 건달도 사시미 사용을 마다 않던 자들에 의해 끝나 버렸다. 주먹이 약한 것이 아니라 더 치사하지 못해서 더 야비하지 못해서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정치적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악랄한 수법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이긴다. 결국 무자비한 경쟁이 있는 곳은 늘 소시오패스의 놀이터가 된다. 

따라서 정쟁을 통해서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쟁의 장은 사이코패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장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경기장을 게임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

거짓에 속한 이들이 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혹 침투를 하더라고 그들의 게임을 시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투명성이 요구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가 그 사회이다.

반대로 현대 대도시와 정치권, 거대 기업, 각종 거대 기관, 그 중에서도 종교기관은 거짓의 사람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놀이터이다. 이 곳에서 가치에 헌신하는 진리의 사람들이 손발이 묶인채로 이기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즉, 승리는 매우 드물고 비 현실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일상에서 늘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악을 이기려 하면 결국 악한 방법에 중독될 수 밖에 없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쓸수록 악해진다. 혹 그렇게 해서 악한 세력이 물러가도 세상은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악에 물들은 또 다른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운영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허무하다. 

악을 이기는 길은 단순히 악하게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만의 선한 길을 찾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악을 그들은 그렇게 살게 놔두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을 수도 있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의 원리에 따른 공동체로 살면 된다. 그게 모두가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 

정치는 허무한 짓이다. 시시포스의 헛된 노력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무해 보이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정치에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유토피아에 대한 비 현실적 정치적 약속과 민중의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기대는 재앙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환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약속의 명분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광기의 살인자가 되었다. 


유토피아를 약속한 거의 모든 정치적 엘리트의 약속과 민중의 허망한 기대는 결국 커다른 비극과 절망적인 폭정의 야기시켰다.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서 결코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했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거대할 수록,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강할 수록 과도한 정치권력 남용과 무자비하고 광범위한 폭력이 수반되었다. 정치는 허무하다. 


그러나, 풀뿌리 단계에서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가 할 일이 있다. 곧 최악을 막는 것이다. 그게 정치가 할 일이고, 정치의 한계이다. 그래서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이라서가 아니다. 민주주와 함께 사회적 부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한 풀뿌리 운동의 전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허무하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시시포스의 비극과 닮아 있다. 정치적 사상을 믿고, 정치적 엘리트에게 권력을 줌으로써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기 책임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내 주변은 세상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선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는 자기 수련 및 자기 수양 운동이기도 하다.

동시에 스스로를 혁명한 이웃들 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가 바꿈으로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일상 속으로 풀뿌리 단계에서 먼저 다가온다.  

이는 정치적 상부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부구조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기반체제의 변화를 야기하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영적인 정치운동이다. 

사회 기반체제 변혁 풀뿌리 운동과 동시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이는 풀뿌리 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정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사회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풀뿌리 운동을 짓밟는 정치적 과잉을 야기하는 정치 만능주의와 함께 풀뿌리 운동을 위한 사회적 환경 조성을 좌절시키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교만과 시기심라는 지옥, 겸손 속의 천국

&3/11/2014 11:07:14 AM

90년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클린턴 정부의 IT 권장 정책으로 미국의 IT 분야는 돈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미국 IT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이 미국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장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한국 가게를 들러야 했다. 그 동네 신출내기였기에 인사를 해야 했고 소개를 해야 했다. 여기서 낯선 감정들을 경험했고, 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균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만 접촉할 수 있었다. 사는 동네가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다��� 이들의 복잡 다단한 심리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계급 상승을 추구한다. 교포 사회에서 이민 1세들의 꿈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Msg15]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들이 꿈꾸는 주류 사회 진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부러움이 있었고, 질투가 보였다. 

교포사회 사람들은 흔히 못사는 흑인 동네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흑인들은 보통 장사를 잘 하지 않는다. 동네가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백인들도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꺼린다.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도 이 점을 알고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 시작해 성공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인이나 유대인이나 무주공산을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해서 재정적 성공을 한 점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공한 이후 성공을 누리고 관리하는 방식이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의 다른 점이라 한다. 

성공을 하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부유한 백인 교외 지역으로 이사하고 낡은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주급과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랑스럽게 BMW, 벤츠, 렉서스와 같은 고급 차를 몰고 출근한다. 이 차를 당당하게 가게 앞에 주차함으로써 자신들이 최근에 획득한 경제적 신분을 과시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즐기고 자신의 상처입은 열패감을 만회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들이 비참한 느낌을 들게 함으로 얻는 더러운 만족감을 즐긴 것이다. 한국인들 끼리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하던 비교 질 자랑 질 버릇이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새는 박아지가 미국에서도 샌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랑 질이 시작이 되면 조만간 그 가게가 흑인 강도에 의해 털린곤 한다고 들었다. 흑인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기들 주머니를 털어서 부자가 되었음에도 흑인들과 친구가 되어 흑인 사회에 공헌을 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차부터 바꾸고 이웃인 흑인들로부터 스스로 분리 구분하고 거만하게 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이렇게 저렴하게 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한국들의 삶과 성공에 대한 동기가 멸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활한 유대인은 성공한 이후에도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 몰던 낡은 차를 몰고 가게에 간다고 한다. 비록 집은 멀리 교외 지역으로 이사 했어도 가게에 출근 할 때에는 옷도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 있는 고급 차는 절대로 가게로 몰고 가지 않는다. 흑인들이 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끔, 그리고 유대인 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에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온몸으로, 태도에서, 차에서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오만한 길로 살다가 흑인들의 사회적 분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행히 이제는 교포 사회는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졌다.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한국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안의 반사회적 또는 반공동체적 요소는 이렇게 다른 문화와 비교하고 접촉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경우 2,000년 전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고 방랑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다수 이방인에 둘러 쌓여 있는 삶이었다. 유대인이 가난하던, 부자던 이는 쉬운 삶이 아니다. 가난하면 무시하고 차별 당한다. 부자이면 질투하고, 심하면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흑인 사회와 노골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를 획득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경우 아직은 어설프다.

우리 모두 안에 자신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파괴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이들이 실패하는 것을 봐야 만족이 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유대인은 잘 이해하고 처신하고 있는 듯 했다.

펜실베이니아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다른 주의 한국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교회 주차장에 벤츠, BMW, 렉서스, 아큐라가 많은지! 사람들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지, 수입의 규모가 어떤 지를 아는 나로서는 황당한 그림 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겪는 사회적 좌절감을 교회라는 사회 속에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고 좌절된 그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보상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병든 마음 상처 받은 자존심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안타까웠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고 펜실베니아 웨스터체스터 카운티에 살았었다. 바로 옆이 랭커스터 카운티였다. 우리는 웨스터체스터와 랭카스터 카운티 경계에 살았었다. 우리가 가는 월마트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었다. 이들이 아미쉬였다. 우연히 우리는 아미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들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나뱁티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 중 하나를 가게 되었다. 한국 교포 교회와 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가장 눈에 뛴 차이는 자동차였다. 고급 차가 하나도 없었다. 반짝반짝한 최신 중형차도 없었다. 차들은 대부분은 낡고 겸손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고급 명품을 걸치지 않았다. 명품 전시장이었던 한국인 대형 교회의 모습과 판이한 차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지에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Plain People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이 Plain People이라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게 한 내적 기반을 이해하자,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은 Plain People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묶이지 않고, 노예가 되어 죽기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외적 표현이 그들의 자동차였고, 옷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우리는 한참을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예배 후 약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외에 아무도 교회를 떠나기 위해 주창장으로 나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아무도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개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처럼 같은 집단 내의 이웃을 패배자(Underdog)로 만들어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칭찬하는 시녀와 팬클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웃을 딛고 일어서서 내려다 보기 보다는 오직 위로만 향하는 야망의 길에서 내려와 다들 교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를 안부를 궁금해 하고 겸손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봤다. 당시 나는 고연봉 자였다. 아큐라라는 혼다 고급차 브랜드를 몰았었다. 다음에는 렉서스나, BMW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정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흔한 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생각 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이고, 비난 받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운 삶의 방식임을 보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사탄의 생각,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생각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를 방문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쪽 팔렸다.

그 이후 우리도 자발적인 아나뱁티스트가 되어서 그들처럼 스스로 Plain People이 되어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즉, 다른 이들의 세상적 성공을 질투하지도 않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어떠함을 차나, 집, 옷, 사회적 지위, 학위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교만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부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세상적 성공을 Show Up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처럼 Plain People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천국을 보았다. 서로가 은밀히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멸시하거나 남몰래 비참해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누가 잘나가지는 가지고 관계의 긴장이 없었다. 누가 더 잘 낫는지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낮아지기로 결정하고, Plain People 중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자 평화가 있었다. 거기에 천국이 있었고 참 공동체적 관계가 있었다. 

양심이 가진자가 90% 이상인 이유

&3/2/2013 11:39:19 AM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거대 도시 사회에서는 양심을 가지지 않은 소시오패스 같은 부류가 승자이다. 그래서 거대 도시에서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환경의 영향 하에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각성한다.

그럼에도 불구���고 인류의 90% 이상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포함한 게임의 법칙에 의하면 결국 배신자 전략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늘 이긴다. 그래서 이들만이 자손을 남길 기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 양심을 가진 인류의 특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부당함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그래서 부당함에 저항하게 만들다가 쉽게 비명 횡사하게 만든다. 이들이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자본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이들은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비참한 가난의 상태에 빠지고, 소시오패스 기회주의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자본을 누린다. 한국의 경우 거대 족벌 언론들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라는 사회적 자본의 혜택을 누리면서 권력을 횡사하는 것과 같다.

기록된 역사에는 늘 이런 게임이었다. 양심을 가진자는 비명횡사가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하고 번영한 이유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서 배신자들 사이에 있으면 이들은 소시오패스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연대해서 공동체를 이루면 게임이 법칙이 달라진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역사였기에 양심을 가진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자본주의는 소시오패스를 위한 체제이다.

따라서 공동체 복원은 인류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consciences-shared-by-the-90

왕의 제도를 뒷 받침한 주류 교회

&2/5/2013 12:34:43 PM

모든 주류 종교는 제국의 종교가 됨으로써 주류 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에는 로마제국이 있었다. 이슬람에는 이슬람 제국이 있었다. 불교는 인도 최초 통일 국가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제국이 있었다. 그리고 유교를 위해서는 한제국이 있었다. 예외가 없다

따라서 모든 주류 제도 종교는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 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삶의 방식으로 표현한 공동체를 가장 혐오한 그룹은 제도교회의 기득권 그룹일 수 밖에 없었다. [755p218]

왕권이 신성하다는 개념은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되고 나서야 서서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판단하는 하나님과 성경의 기본 정신에 [1 Samuel 8:18] 반해서 기독교 사제들은 왕과 귀족의 약탈을 정당화 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시 했다. [755p200]

따라서 왕의 제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류 교회 다시 말해 제국의 약탈 논리를 지지한 도그마를 떠나야 한다. 이 과정은 자기 부정의 과정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state-and-church

공동체와 노동가치설

&2/20/2014 4:50:19 PM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이후 아담 스미스가 설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설명을 한 맥락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상인계급의 불의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경제 이념은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였다. 상인들은 중상주의의 논리에 따라 상업을 보호하라고 국가권력에 개입하여 권력을 조정하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상주의 논리로 그들 상업권력을 위한 불공정 경쟁 체제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주장했다. 자유로운 공정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체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강자의 불공정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논리로 보이지 않는 손이 강조된다. 예수님처럼 아담 스미스도 기득권의 수호자로 강탈되어 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아담 스미스의 명성과 그의 아이디어는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대자본이 자유롭게 불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앞세워서 정글 자본주의 또는 해적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소수 부자와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도 중농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바늘공장의 비유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는 조직된 노동력이 결국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기술도 새로운 생산방식도 결국 훈련되고 조직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포드이즘의 컨베이어 시스템도,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도, 반도체 개발도, 인터넷 혁명도 사람, 곧 훈련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개별적 노동력이 잘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조직되지 않고서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문제는 노동의 조직에 있다.

불행히도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스스로 조직하고 초기의 위험을 감수할 재정적 심리적 역량이 없다. 때문에 결국 조직화되고 훈련화된 노동이 창출할 수 있는 부는 노동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개별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자들은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의 부품이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생산성 혁명은 있었으나, 공평치 못한 부의 분배로 더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이전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자금이 있다먼저 당장의 재정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 생산체제는 자본가의 몫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이 없는 노동가들이 기술이 있어도안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결과가 좋을 경우 재주는 노동가가 부리고 가치생산 체제의 소유권을 가진 자본가와의 분배의 게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소자본 창업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 노동자는 월급이라도 챙기지만, 창업자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자본이 없는 다수는 노동자의 길, 봉급쟁이 삶을 선택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가치를 창출한 노동력에 더 많은 부가 배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탐욕을 미워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 곧 자본가들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노동자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가는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뭉치하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자본가가 조직한 개별 회사 내에서 파생된 조직이다.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가 있고 난 다음에 파생적으로 그 회사의 노동조합이 있다. 파생조직이기에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공산주의 이상을 보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려 하고, 신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쓰고, 증오와 투쟁의 희생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증오와 투쟁을 심어 주는 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옳았지만, 불의를 해결하는 에너지를 불의를 만든 에너지에서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기 쉬운 우울하고 안타까운 운동이었다.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불의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보다는 나아 보인다. 무책임하게 역사적 책임을 방임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적 불의에 저항한 이들 때문이라도 우리의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00년전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등장했을 때에 지배체제에 위협이 된 것은 후터라이트 노동자들이 중세의 농노처럼 토지를 가진 지주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를 통해서 노동을 조직화 했다. 그들의 사회안에는 영주, 지주와 같은 폭력과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인 지배계급도 없었다. 자본가와 같이 축적된 자본의 힘을 지렛대로 다수를 지배하고 하는 자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되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영주도, 기사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자치를 했다. 자본가들의 자본 없이 노동을 조직했고,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조직화된 노동에 기초한 부를 창출했다.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잘 사회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지속시켰다.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아나뱁티스 그룹이 한 때 구교 신교 보다 많았었다고 한다. 가혹한 박해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달라 졌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무장 혁명론자들이 갖고자 하는 국가폭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고도 공산주의를 실행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의 에너지가 아닌 자기부인과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었다. 즉,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지배한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동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주, 지주 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가톨릭과, 신흥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폈던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터라이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후터라이트들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체제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될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리더들은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아나키즘이 유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유럽은 붕괴되고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지주나 자본가 주도하는 지배와 종속관계라는 사회적 틀에 대중들이 복속되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라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룰지라도 반드시 이를 선택을 하려 저항하고 투쟁할 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치적 공동체라는 대안의 존재, 당시에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를 세상에서 없애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12개 그룹 이상 되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 대부분은 사라졌다. (지금은 3개 그룹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마저 지우려 했다. 이제 역사의 계절이 바뀌어 3개, 7개, 12개 이상의 자발적 아나뱁티즘 그룹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아나뱁트스트에 대한 적대감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처럼 이들이 배척당하고 죽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죄명은 예수님처럼 반역죄였다. 정치적 죄였다. 아나뱁티스에 대한 대학살 사태를 일으킨 드러난 명목은 종교적이었다. 더 깊은 곳에는 정치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내적으로는 이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라 본다. 

라카츠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립한다. [세상과 대립 발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디서나 이 두 세력은 서로 싸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 그러나 조직화고 훈련된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노동자가 누리기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를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조직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연대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몫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먼저 리스크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노동력 조직화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자기가 대고 리스크를 먼저 지기 때문엔 분배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갈등이 근대 세계를 이끌어 왔다. 2012는 협동조합의 해라고 했다. 이제 피가 흥건한 근대를 마무리를 하고 협력의 시대를 열 때가 아닐까?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모델이며, 증명된 모델이다. 후터라이트는 500년여년 이 방식으로 살아왔다. 즉, 500여년 이상의 세월로 증명된 삶의 모델이다. 

공동체, 또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본가에만 집중된 부가 편중된에 현실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슬퍼하고 그에 따른 불의를 분노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타도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온다. 외부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내부를 향하고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극이다.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킬링필드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동경대에서도 이 일이 일어났다. 

먼저 자기 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와 같은 죄가 악한 구조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때문에 들보를 빼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위탁하고 헌신함으로 세상이 질서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한다고 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communities-and-labor-theory-value

고대 노예제처럼 현대 시간제 노예제도는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나?

&6/12/2013 2:11:25 PM

노예제는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도록 설계된 사회제도이다. [1] 그렇다면 노예제처럼 현대 종업원 제도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일까? 만약에 노예제 수혜자들이 했던 일을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들이 같은 일을 한다면 그러하다.

미국에서나 로마에서나 노예나 소작농의 사회적 결속력을 파괴하는 것에 대주주의 우선적 관심이 있었다. 또한 노예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하는 프라파간다로 자유인들을 교육했다. [2]

질문은 이것이다. 현대 자본가들이 종업원들끼리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고, 연대하지 못하게, 때로 착취 당하거나, 부당하게 노동력을 이용 당하는 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도록 시민들을 교육시키는가? 답을 그렇다이다.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 세계는 점점 사회적 결속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스스로 내부붕괴로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보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____________________

[1] 제국의 탄생, p412

[2] 제국의 탄생, p426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02-ENG

 

이방 나라와 같이

&7/28/2013 7:23:45 PM | 1 Samuel 8:5, 1 Samuel 8:3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사무엘 때까지 잘 기능했던 것이 사무엘 이후로 중단되었다. 하느님이 주신 제도도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으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이 경우 새로운 사람을 구했어야 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는 이상 어떤 제도도, 정책도 문제가 발생한다.

제도의 차이는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경우 최악으로 어디까지 나빠지는 지를 보고 알 수 있다. 왕의 제도와 거기에 따른 강자 중심 지배 체제와 경제 시스템은 공동체의 근본적 붕괴를 이끌고, 빈부 격차를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고 일단 이 제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비 가역적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주신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우리들의 악함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 나라의 시스템에 대한 거부를 할 수 있는 핑계를 삼았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 체제를 거부하고, 왕의 체제, 이방 나라 체제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 도입하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거부했다. 기득권이자 대다수 부자였던 장로들이 나서서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장로들에게는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제도, 큰자가 작은자를 섬기는 제도가 불편했을 것이다. [1 Samuel 8:4]

결국 이들은 하느님의 리더쉽이 관통할 수 있는 체제를 버리고, 인간의 욕심과 아집을 관철하기 쉬운 제도를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버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s-the-gentile-nation

왕국복음과 하나님 자녀들의 일어남

&7/28/2013 9:51:03 AM

오래 전에 왕의 제도가 들어왔다. 즉, 자치적 공동체에 반하는 강자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공동체는 폭력에 의해 해체 되었고, 사람들은 왕의 도시에 던져 졌다. 왕의 도시에 들어간 자들은 도시 주도의 착치 지배 체제의 부품이 된다.

이 구조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그 결과 모두 착취 체제의 더 높은 곳에 올라 가려는 경쟁을 한다. 일단 아래에 놓이면 존중 당하지 않는다. 의견은 무시 당하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체제에 적합한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왕의 제도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재 생산해 내기도 한다.

하나님의 왕국 복음이란, 이제 왕의 제도 곧 큰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제도가 끝난다다는 뜻이다.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제도가 그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주인의식, 주권 의식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사람에게 지배 받는 것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지배하는 자치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비전의 구체적인 실체는 공동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삼는 길이기 때문이다. [삼상 8:7]

이게 가능하려면 그 안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임이 있어야 한다. 그들 끼리는 가치적 차원에서 위 아래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 안에 하느님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안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는 않는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20-ENG

돈의 지배가 확립된 내적 기초

[Msg805] &6/16/2013 11:56:53 AM

모든 체제는 그 체제를 뒷 받침해주는 인간의 내적 기초가 있기 마련이다. 농업, 식당업 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항상 배고프기 때문이다. 의상 디자인, 미술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미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자본의 지배가 확립된 이유는 무엇일가? 거의 모든 인간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수의 사람들이 1 억만 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는 설문 조사 보고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돈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의 지배한 체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더 사랑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돈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그들의 힘이 강화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종속시키자, 사람들이 그리로 더 몰려 들었다. 일단 돈이 지배하는 체제 안에 들어가면 거의 사람들은 결국 돈을 가장 사랑하는 가치 체제에 점령을 당한다.

돈은 사람들을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할 힘을 준다. 그 힘을 인식한 소수의 병든 영혼들(사이코패스, 마키아밸리스트)은 돈의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 병적으로 돈을 추구한다. 보다 독하고 강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결국 자본을 축적하고 시장을 지배하고, 이익을 독점한다. 이들이 시장을 통제하고 결국 건강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면 통한 돈을 통한 병든 자들의 지배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무자비한 사람에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추종한다. 이러한 돈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시장을 이미 조종하고 있는 소수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대중은 빚의 노예, 곧 돈의 노예가 된다.

시스템 위에서 이 모든 것을 강제하는 소수의 사람은 생존과 자유가 아니라 사람들을 빚으로 지배하고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서 세상을 차압하기 위해 돈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자기를 위한 돈을 축적해서 스스로 자기만 구원하려는 세속 구원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하느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도리, 인간 구원 길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현 시대, 곧 현 세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돈의 지배를 경험해야 돈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적 체제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돈의 지배 하에서 고생하는 탕자의 경험이 대다수 인간에 필요한 지도 모른다.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돌아온 탕자를 위한 것이지, 아직 돈에 중독되어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돈독을 이해하고 그 것 때문에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사무엘상 8 장의 얘기는 이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왕의 질서를 받아 들인 이유도 동일하다.

사무엘상 8장의 자유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다.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하고 노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스스로 왕에게 종속되어 왕에게 힘을 몰아줌으로써 이들도 다른 나라들처럼 강력한 왕의 덕을 봐서 노예들을 더 부리고 싶어 했다. 

[삼상 8:20] 돈으로 지배하고 군림하고 싶기 때문에 돈에 힘에 마음이 굴복당해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부유한 노예가 가난한 자유인보다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돈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다. 돈이 얘기하는 유토피아가 거짓임 알아야 돈의 지배가 끝날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초는 교만과 거기서 나온 지배욕, 허영심 때문이지 않을까?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basis-that-allowed-money-to-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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