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이 가진자가 90% 이상인 이유

&3/2/2013 11:39:19 AM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거대 도시 사회에서는 양심을 가지지 않은 소시오패스 같은 부류가 승자이다. 그래서 거대 도시에서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환경의 영향 하에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각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포함한 게임의 법칙에 의하면 결국 배신자 전략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늘 이긴다. 그래서 이들만이 자손을 남길 기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 양심을 가진 인류의 특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부당함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그래서 부당함에 저항하게 만들다가 쉽게 비명 횡사하게 만든다. 이들이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자본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이들은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비참한 가난의 상태에 빠지고, 소시오패스 기회주의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자본을 누린다. 한국의 경우 거대 족벌 언론들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라는 사회적 자본의 혜택을 누리면서 권력을 횡사하는 것과 같다.

기록된 역사에는 늘 이런 게임이었다. 양심을 가진자는 비명횡사가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하고 번영한 이유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서 배신자들 사이에 있으면 이들은 소시오패스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연대해서 공동체를 이루면 게임이 법칙이 달라진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역사였기에 양심을 가진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자본주의는 소시오패스를 위한 체제이다.

따라서 공동체 복원은 인류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consciences-shared-by-the-90

공동체와 노동가치설

&2/20/2014 4:50:19 PM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이후 아담 스미스가 설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설명을 한 맥락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상인계급의 불의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경제 이념은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였다. 상인들은 중상주의의 논리에 따라 상업을 보호하라고 국가권력에 개입하여 권력을 조정하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상주의 논리로 그들 상업권력을 위한 불공정 경쟁 체제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주장했다. 자유로운 공정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체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강자의 불공정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논리로 보이지 않는 손이 강조된다. 예수님처럼 아담 스미스도 기득권의 수호자로 강탈되어 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아담 스미스의 명성과 그의 아이디어는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대자본이 자유롭게 불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앞세워서 정글 자본주의 또는 해적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소수 부자와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도 중농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바늘공장의 비유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는 조직된 노동력이 결국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기술도 새로운 생산방식도 결국 훈련되고 조직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포드이즘의 컨베이어 시스템도,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도, 반도체 개발도, 인터넷 혁명도 사람, 곧 훈련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개별적 노동력이 잘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조직되지 않고서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문제는 노동의 조직에 있다.

불행히도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스스로 조직하고 초기의 위험을 감수할 재정적 심리적 역량이 없다. 때문에 결국 조직화되고 훈련화된 노동이 창출할 수 있는 부는 노동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개별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자들은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의 부품이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생산성 혁명은 있었으나, 공평치 못한 부의 분배로 더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이전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자금이 있다먼저 당장의 재정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 생산체제는 자본가의 몫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이 없는 노동가들이 기술이 있어도안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결과가 좋을 경우 재주는 노동가가 부리고 가치생산 체제의 소유권을 가진 자본가와의 분배의 게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소자본 창업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 노동자는 월급이라도 챙기지만, 창업자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자본이 없는 다수는 노동자의 길, 봉급쟁이 삶을 선택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가치를 창출한 노동력에 더 많은 부가 배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탐욕을 미워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 곧 자본가들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노동자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가는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뭉치하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자본가가 조직한 개별 회사 내에서 파생된 조직이다.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가 있고 난 다음에 파생적으로 그 회사의 노동조합이 있다. 파생조직이기에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공산주의 이상을 보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려 하고, 신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쓰고, 증오와 투쟁의 희생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증오와 투쟁을 심어 주는 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옳았지만, 불의를 해결하는 에너지를 불의를 만든 에너지에서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기 쉬운 우울하고 안타까운 운동이었다.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불의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보다는 나아 보인다. 무책임하게 역사적 책임을 방임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적 불의에 저항한 이들 때문이라도 우리의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00년전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등장했을 때에 지배체제에 위협이 된 것은 후터라이트 노동자들이 중세의 농노처럼 토지를 가진 지주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를 통해서 노동을 조직화 했다. 그들의 사회안에는 영주, 지주와 같은 폭력과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인 지배계급도 없었다. 자본가와 같이 축적된 자본의 힘을 지렛대로 다수를 지배하고 하는 자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되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영주도, 기사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자치를 했다. 자본가들의 자본 없이 노동을 조직했고,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조직화된 노동에 기초한 부를 창출했다.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잘 사회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지속시켰다.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아나뱁티스 그룹이 한 때 구교 신교 보다 많았었다고 한다. 가혹한 박해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달라 졌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무장 혁명론자들이 갖고자 하는 국가폭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고도 공산주의를 실행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의 에너지가 아닌 자기부인과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었다. 즉,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지배한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동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주, 지주 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가톨릭과, 신흥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폈던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터라이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후터라이트들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체제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될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리더들은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아나키즘이 유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유럽은 붕괴되고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지주나 자본가 주도하는 지배와 종속관계라는 사회적 틀에 대중들이 복속되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라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룰지라도 반드시 이를 선택을 하려 저항하고 투쟁할 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치적 공동체라는 대안의 존재, 당시에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를 세상에서 없애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12개 그룹 이상 되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 대부분은 사라졌다. (지금은 3개 그룹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마저 지우려 했다. 이제 역사의 계절이 바뀌어 3개, 7개, 12개 이상의 자발적 아나뱁티즘 그룹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아나뱁트스트에 대한 적대감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처럼 이들이 배척당하고 죽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죄명은 예수님처럼 반역죄였다. 정치적 죄였다. 아나뱁티스에 대한 대학살 사태를 일으킨 드러난 명목은 종교적이었다. 더 깊은 곳에는 정치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내적으로는 이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라 본다. 

라카츠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립한다. [세상과 대립 발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디서나 이 두 세력은 서로 싸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 그러나 조직화고 훈련된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노동자가 누리기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를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조직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연대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몫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먼저 리스크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노동력 조직화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자기가 대고 리스크를 먼저 지기 때문엔 분배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갈등이 근대 세계를 이끌어 왔다. 2012는 협동조합의 해라고 했다. 이제 피가 흥건한 근대를 마무리를 하고 협력의 시대를 열 때가 아닐까?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모델이며, 증명된 모델이다. 후터라이트는 500년여년 이 방식으로 살아왔다. 즉, 500여년 이상의 세월로 증명된 삶의 모델이다. 

공동체, 또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본가에만 집중된 부가 편중된에 현실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슬퍼하고 그에 따른 불의를 분노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타도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온다. 외부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내부를 향하고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극이다.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킬링필드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동경대에서도 이 일이 일어났다. 

먼저 자기 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와 같은 죄가 악한 구조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때문에 들보를 빼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위탁하고 헌신함으로 세상이 질서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한다고 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communities-and-labor-theory-value

하느님의 나라는 규모에 있지 않다!

&1/29/2014 10:57:51 AM

천국이 규모에 있다고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세속 종교화한 자본주의 또는 돈의 메시지이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물리적 규모에 있지 않다. 사람 숫자에 있지 않다. 다수가 인정하는 인지도에 있지 않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다수가 선택하는 길이 아니다. 천국은 국민투표로 오지 않는다. 

천국이 물리적 규모에 있다면 제국의 황제가 사는 곳이 천국일 것이다. 천국이 돈의 규모에 있다면 재벌들이 먼저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규모에 있지 않음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에 있다. 천국의 생명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접촉하고 누릴 수 있다.

세상적 생각에 무의식적 삶의 방식이 점령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천국은 규모에 있지 않다는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삶으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고 반대로 산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는 천국은 사람의 숫자, 건물의 규모, 세상적 명성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형 건물, 멤버의 숫자, 그리고 유명세에 집착을 한다.

그 사람의 믿음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말에 주의하지 말라. 그 사람의 삶, 시간과 돈을 어디에 투자하는 지를 보라.

생각과 가슴과 그리고 손발이 각각 안드로메다만큼 먼 위선자들은 극히 위험한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왕국을 위한 건물의 규모, 사람의 규모, 영향력의 규모 확대를 위해 다른 사람들 안의 천국을 파괴한다. 이들은 지옥 자식이다. 천국을 빙자해서 지옥을 퍼뜨리는 독사의 자녀들이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규모가 아니라 의와 평안과 기쁨에 있다.

천국의 생명을 가진 사람, 천국 생명의 사람이 모여야 천국을 이룰 수 있다. 천국의 생명이 없는 사람 1000명, 10,000명이 모여도 천국은 없다. 그 중심에 천국이 없으면 지옥적 에너지만 더해질 뿐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지옥에 가까워 진다. 

단지 두 사람이 모여 있어도 천국의 누림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들 모두에게 천국의 생명이 있고, 사랑의 교제가 있다면 거기에 천국이 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규모가 아니라 생명에 있다.

건물의 규모가 천국을 가져오지 않는다. 건물은 죽었다. 건물은 자기 복제 능력이 없다. 스스로 자라지도 않는다.

천국의 생명은 스스로 자란다. 자기 복제 능력이 있다. 지극히 작은 어린 아이라도 그 중심에 천국이 있다면 생명의 방식으로 성장할 것이고 자기 복제를 할 것이다.

규모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젖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천국을 파괴하는 미친 짓은 하지 말라.

에고의 허영심과 욕심을 버려라. 겨자씨 같은 작은 것이라도 거기에 생명이 있으면 천국은 느린 것 같지만 확실하게 성장한다. 결코 조바심이 내며 규모에 집착하지 말라. 거기에 천국의 생명이 없고 천국도 없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quantity-vs-quality-in-heaven

돈의 지배가 확립된 내적 기초

[Msg805] &6/16/2013 11:56:53 AM

모든 체제는 그 체제를 뒷 받침해주는 인간의 내적 기초가 있기 마련이다. 농업, 식당업 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항상 배고프기 때문이다. 의상 디자인, 미술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미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자본의 지배가 확립된 이유는 무엇일가? 거의 모든 인간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수의 사람들이 1 억만 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는 설문 조사 보고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돈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의 지배한 체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더 사랑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돈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그들의 힘이 강화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종속시키자, 사람들이 그리로 더 몰려 들었다. 일단 돈이 지배하는 체제 안에 들어가면 거의 사람들은 결국 돈을 가장 사랑하는 가치 체제에 점령을 당한다.

돈은 사람들을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할 힘을 준다. 그 힘을 인식한 소수의 병든 영혼들(사이코패스, 마키아밸리스트)은 돈의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 병적으로 돈을 추구한다. 보다 독하고 강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결국 자본을 축적하고 시장을 지배하고, 이익을 독점한다. 이들이 시장을 통제하고 결국 건강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면 통한 돈을 통한 병든 자들의 지배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무자비한 사람에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추종한다. 이러한 돈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시장을 이미 조종하고 있는 소수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대중은 빚의 노예, 곧 돈의 노예가 된다.

시스템 위에서 이 모든 것을 강제하는 소수의 사람은 생존과 자유가 아니라 사람들을 빚으로 지배하고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서 세상을 차압하기 위해 돈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자기를 위한 돈을 축적해서 스스로 자기만 구원하려는 세속 구원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하느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도리, 인간 구원 길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현 시대, 곧 현 세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돈의 지배를 경험해야 돈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적 체제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돈의 지배 하에서 고생하는 탕자의 경험이 대다수 인간에 필요한 지도 모른다.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돌아온 탕자를 위한 것이지, 아직 돈에 중독되어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돈독을 이해하고 그 것 때문에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사무엘상 8 장의 얘기는 이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왕의 질서를 받아 들인 이유도 동일하다.

사무엘상 8장의 자유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다.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하고 노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스스로 왕에게 종속되어 왕에게 힘을 몰아줌으로써 이들도 다른 나라들처럼 강력한 왕의 덕을 봐서 노예들을 더 부리고 싶어 했다. 

[삼상 8:20] 돈으로 지배하고 군림하고 싶기 때문에 돈에 힘에 마음이 굴복당해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부유한 노예가 가난한 자유인보다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돈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다. 돈이 얘기하는 유토피아가 거짓임 알아야 돈의 지배가 끝날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초는 교만과 거기서 나온 지배욕, 허영심 때문이지 않을까?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basis-that-allowed-money-to-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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