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9/18/2013 2:15:33 PM

구약은 모세의 율법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율법의 대 강령은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40]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에게 새로운 한 개의 계명을 주셨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하나의 새 계명을 주심으로 율법을 더 완전하게 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요한복음 13:34]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15:12]

 구약적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라디아서5:14]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 형제에게 한 일이 곧 예수님에게 한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고백하고 주장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자칭 신도들을 예수님이 정한신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 하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이 서로 형제로 받아들여서, 예수님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다. 곧 자신을 죽여서 친구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 음료와 빵으로 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법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 하라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천국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그분처럼 자기(에고와 육체적 생명)를 죽이기까지 사랑의 명령에 순종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는 이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공동체의 실체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법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고 주여 주여 하면서 종교적인 실행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들은 천국의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을 어겼기 거기에 따라 심판이 임할 것이다.

양과 염소는 구분될 것이다. [마태복음 25:31-40] 곧 사랑을 실천한 양과 서로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구원만을 위해 자기를 높이고 종교적 외식과 자기를 위한 영성에만 열중한 염소를 가르고 심판을 하실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다. 성령을 거역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짓이다. 

이는 부자들과 기득권에 입 맛에 따라 만들어진 거짓 복음이다. 이기적인 내가복음에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종교적 외식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기(에고)를 비우고 낮추어 서로 종이 되어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길로 가야 한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고 종교적 외식과 종교적 지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들을 예수님은 저주 하셨다. 이들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만 지옥의 길(자기를 채우고 높이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길(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고 그들을 더한 지옥 자식(자기를 높이려는 자들)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1-15]

불행히도 공적인 기독교는 소유문제와 폭력문제에 실패했다. 역사의 고비마다 하나님 나라의 샘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충격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 왔으나, 공적인 교회에 의해 철저히 거부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공적인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one-commandment-of-jesus

 

고립된 초월적 경험이 아니라 성육신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

&2/17/2014 12:07:02 PM

고립적 명상은 자위 행위를 닮아 있다. 베드로의 초막은 나르시시즘적 이탈이다. [마 17:4]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홀로 즐거울 수 있는 길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곧 성육신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적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은 사랑의 안에 있고, 사랑은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고립적이고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르심은 동행이다. 천상 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를 향한 부르심이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친 짓을 그만 두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요 15:12]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헌신으로 즐거워하라. [요 15:11] 이게 예수의 길을 따른 자의 ‘도’이다.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한 손길, 배려의 말, 섬김을 통해 남편 또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른 길의 그림이다. 혼자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적 즐거움은 건강한 기쁨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기쁨은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안에 있다.

결국 사랑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 가야 할 길이다. 존재 자체가 다른 이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 사적 이익과 계산이 개입되지 아니해야 한다. [마 5:46~47] 아버지처럼 사랑을 은혜로 베푸는 자체를 기쁘게 여기는 사랑의 존재가 될때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 5:45

하나님은 사랑이다. [요일 4:8]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푼다. 그래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춘다. [마 5:45]

참 사람의 참 기쁨은 사랑 안에 있다. [요일 1:4, 요 15:11]

술이 잠시 기쁨을 주고, 마약에 환락에 취하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중독되면 건강하지 못하다. 자위적 기쁨이고, 자기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얻고 풍성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사랑이 선하고 아름답다. [요 10:10]

영적 수련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자기 자신의 구원과 기쁨만인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자기를 향한 자기 사랑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의 훈련과 즐거움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 [약 1:27]

더불어 즐겁고 천국 안에 있기 위해서는 사랑의 봉사와 섬김이 뒤 따라야 한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노동의 즐거움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본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누리고 생명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형제자매의 관계 안에서 형제 자매를 위한 노동과 섬김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이것이 육과 에고를 거슬러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 있는 육체를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롬 12:1]

자신을 드려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즐기는 행복을 누려라. 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이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지옥과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노예 삼고자 하는 곳이다.

천국적 삶의 방식을 내면화 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적 삶이 형태나 나타나게 된다. 이들의 삶의 내용이 이 땅에 임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 중 하나이다. 

더 이상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가 공동체이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바쳐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자 공동체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isolated-mediation-and-the-dangers

캐나다 개척 시대의 흔적

2008년 방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우리 아이들과 우리들은 퍼스트 미니스터를 그렇게 부른다.)가 우리를 자기들의 엔틱들을 모아논 곳을 보여주겠다면 데리고 같다. 거기에 오래된 다리미, 장난감,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였는데, 접이식이었다. 나는 왜 접이식이냐고 물었다. 그 사연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후터라이터는 칼을 쓰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들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 2:4'의 말씀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2:4)

후터라이트는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떠난 역사가 있다. 고생 끝에 개척해서 얻은 비옥한 흑토 땅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전쟁에 나서라는 정부의 요구 때문이었다. 187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고생 끝에 겨우 개척이 끝났는데, 미국 정부도 이들의 평화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에 요구에 적극적으로 항의한 후터라이트 젊은이가 알카트라즈에서 죽어 나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화운동은 세련되고 그리 위험한 운동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평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이전에 트라실베이나, 그 이전에 항가리, 그 이전에 모라비안, 그 이전의 티롤, 그 이전의 스위스에서처럼 이들은 개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첫 겨울이 힘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집에( 40) 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접이식 세면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2009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에 젊은 친구에게 들었다.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80년이 되어서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다고 한다.

이들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감동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아린 것을 느낀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치룬 대가 때문이다.

자기 번영을 위한 선택과정 중에 고생이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인 고난의 선택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질고를 아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 53:3) 이들의 삶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남의 고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1:24)

젊었을 때에 자기 몸 하나 던지는 것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그나마 기득권이라도 가진 사람이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믿음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운동을 하건, 또는 선교사로든 헌신을 했지만, 결혼 이후,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난 이후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의 길로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도의 길은 모든 것을 걸을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길이다. 근 500년간 기독교 공산사회의 삶을 살아온 후터라이트의 걸어온 자취와 존재는 비용을 먼저 계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의 엄중함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 14:28)

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1-ENG

Following the Jesus-way in lifestyle

 

(미국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을 때에 Lancaster의 Amish Village를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Anabaptist를 소개하는 Visitor Center가 있었다. 거기서 찍은 사진이다.)

후터라이트, 아미쉬, 그리고 올드오더 메노나이트는 마더런 메노나이트와 같지 않다. 신학교도 없고, 외부와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후터라이트가 왜, 어떻게 해서 Full Community, Community of goods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내적 기초를 추적하려면 직접적인 접근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직접 방문을 하고 사귐을 시작했다.

또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현대화한 일부 메노나이트의 얘기들을 들으면 공산주의적 공동체를 살고 있는 후터라이트 내적 태도를 역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 중의 하나가 이 사진의 글이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후터라이트이든, 메노나이트이든, 아미쉬든 아나뱁티스트는 교리나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는 라이프스타일로, 존재방식, 존재양식으로 예수를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하나님 나라(땅에서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때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following-the-jesus-way-in-lifestyle

왜 후터리안만이 거기까지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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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ct Biblicism 때문이다. [1] 다수 개신교도보다 소수 Anabaptist가 성경적용에 있어서 엄격하다. 그 Anabaptist 중에서도 Hutterites가 사적 소유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지키는 것에 더 엄격한 면이 있다.

부자 청년의 비유를[마태 19:16~22] 통해 부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제로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이 주제는 피하고, 듣는 자도 이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아가 거부하는 주제는 모두 피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주류를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류 제도 종교의 게임의 룰이다.

후터리안은 성경, 특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말씀을 받기 어려워서 다시 자아의 요구와 기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초대 교회만 실행 가능했던 기독교 공산주의적 삶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부자와 이 시대의 부자들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돌이킨다면 등에 실려 있는 재물에 걸려서 바늘귀 문을 통과 못한 낙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낙타가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다. [마태 19:24] 낙타는 그래도 등에 진 짊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리면 바늘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등에 짊어 진 짊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와 달리 부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처럼 짊어진 재산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들이 삶은 사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헌신되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바쳐져 있다.

부자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성공했다. 낙타와 달리 그들이 보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산은 영혼의 짊이 아니라 이땅에서 육체적 삶을 유지시켜주는 반석이고, 산성이고, 생명줄로 여기지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기 쉽다.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많은 재산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재산을 짊어 진체 바늘귀를 통과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바램에 따라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려 하는 유혹에 잘 빠지기 쉽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핍박하는 지리까지 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얼마 안되는 재산을 쉽게 버릴 수 있어서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 곧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위해 헌신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즐거히 들어온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좋은 거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 13: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묶여 있는 짊이 있다. 재산의 짊이 무거울 수록 집착도 더 강하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하늘 나라를 얻는 거래가 남는 거래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데 더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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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was-it-only-the-hutterites-who-went-that-far

사유욕의 제거로 시작되는 공동체 삶의 질서

#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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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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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십자가를 둔 싸움, 하나님 나라와 바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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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들, 또는 세련된 이기주의자들은 십자가를 볼 때 거기서 사적 안식과 위로만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선적 관심이 이생에서의 복, 사적 구원과 행복, 영생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웃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기 희생이라는 십자가의 원칙을 통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질서에 복종시키고,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 나아간다. 

본질적으로 기관으로서의 제도 기독교는 현실 안주주의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본능적으로 영적 영역과 세상적 영역을 구분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자기 희생 없이 안락한 영적 현실 안에서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구지 타락한 세상에 성육신 해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쓰고 고통을 관통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현실안주주의적인 행복을 위해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만한 만만한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이다. 세상에 대해서 위협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하늘 나라와 이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질서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이미 왔고 그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대가로 지불함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찾고 부르고 제자로 세우신다. 하나님 나라의 돌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모세가 이집트 왕자의 신분을 버렸다. 그리스도의 이후의 수 많은 제자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처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기 위해 투자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다. [Hebrews 11:38]

그리고 세상은 이들이 살기에 합당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중에도, 좋은 집에도 있지 않는다. 이들은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거하 기도 한다. [Matthew 11:7 ~ Matthew 11:9] 때로 세례 요한 때에 엣세네파가 그렇게 한 것처럼, 선지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이들은 세상과의 대립, 긴장 때문에 분리되어 광야에 거한다. 역동적인 이들의 믿음과 운동이 이들을 광야로 몬 것이다. [Hebrews 11:38]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ight-to-put-up-the-cross-babylon-and-the-kingdom-of-god

Lead to Community of Goods

&080827113439

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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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Msg552] &11/1/2011 7:22:54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명백하다. 현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건주의자인 자칭 그리스도인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믿고 주장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은 온건주의자들다. 그래서 주류 기독교인들은 삶의 방식을 지키고자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를 적당한 마사지를 거쳐서 전달되게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다수의 인식에서 배제시켜왔다.

주류 기독교인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명백히 극단주의자다. 예수님은 적당한 체면치례만으로 넘어가려는 대다수의 바램을 간단히 밟아 버리셨다. [ 19:18~22]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의 기반을 부셔 버리고 새로운 기초 위에 다시 세울 것을 요구하신다. , 다시 태어나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면 그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셨다.

주류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오직 온건한 방식, 충격적이지 않은 방식의 변화만 받아들일 수 있고,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 주류 기독교도의 대변인인 칼빈의 주장대로 우린 완벽하지 않다. 맞다 우린 모두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사랑의 화신인 하나님은 우리 용서하실 것이다! 얼마나 사악한 논리인가? 그들은 예수님 화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단지 과장법의 대가였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적절히 튜닝하고 양심의 저항을 무력화 시켰다. 예를 들어 이런식이다.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매달 구제비로 $1000 정도를 지불하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원 봉사에 참여하라! 대충 이 정도 수준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지키면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규정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수준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노예가 되라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 10:36] 그런데 어떻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한 정도의 사랑의 실천만으로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친절은 죄인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도 더 잘 실행을 한다. [ 5:47]

주류 기독교도들 사이에선 한달에 $1000 이상을 구제비로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셨다. [ 19:21] 콘스탄티 이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에 신실하지 않은 자들은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 5:1~5]

주류 기독교인들은 고급 주택가, 아파트에 살면서 게토화된 달동네 등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원 봉사를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온건한 수준의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수님이 천국을 뒤로하고 우리 중 하나, 그 중���서도 왕이 아닌 노예의 모습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게토에 들어가서 그들과 하나되기를 요구하셨다.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요구에 충실했다.

그러나 현대 주류 기독교도들에게 이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 보다 공자를(한국인들의 경우), 또는 아리스토델테스를(서구인들의 경우) 더 좋아한다. 물론 공공연히 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자의 가르침 수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행 원칙 수준에서만 실행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 주류 그리스도인은 실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기 보다는 공자의 제자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우린 일요일마다 교회 모임마다 행해지는 예수님에 대한 립서비스를 그만 두어야 한다. , 우린 복음서에 쓰여진 예수님의 구체적인 실행 메시지를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예수님이 명백하게 지시한 구체적인 실행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온갖 종교적 수사와 언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며 거역의 죄를 숨기려 한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 15:12]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그 가르침의 의미는 더 소프트지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좋은 출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구는 이 수준 너머에 있다. , 친구를 위해 그대 자신(육체, 자아)을 죽음에 넘기우는 자리까지 가기를 요구한다. [ 15:13] 주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했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이 말씀을 실행할 것으로 기대하신다. [ 15:14]

예수님은 사랑이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 모호하고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사랑을 실행해야 할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댓가를 치룬다 할지라도 이를 실행하는 해야 한다고 믿고 지금도 실행하고 있는 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our-way-of-life-and-the-evaluation-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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