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낯선 경험들

&4/2/2014 11:29:16 AM

후터라이트와 어울려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류 백인 기독교인과는 공유하기 힘들었던 낯선 경험들을 하곤 했었다

외출을 하고 다녀오면 우리 집 잔디가 때로는 이상하게 깔끔하게 깎여 있을 때도 있었다. 범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어느 날 우리가 외출 이후 집에 돌아올 때, 잘 아는 후터라이트 친구가 잔디를 깍는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럿 후터라이트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의 경험도 주목할 만 했다. 그 때 내 아내는 무척이나 바쁘게 손님 맞이 준비를 해야 했다. 한 후터라이트 가족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집의 부인 되는 분이 아내에게 청소를 도와 줘도 되냐고 물었고 아내는 즐겁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님으로 초대 받은 사람이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조심스럽게 청소를 도와줘도 되냐고 묻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청소를 시작했는데, 청소 광경이 새로웠다. 보통 미국인과 캐나다인은 정리 정돈을 하고 진공 청소기로 바닥 먼지를 빨아 들이는 것으로 청소를 끝낸다. 그런데, 후터라이트 아낙네는 바닥에 무릎은 꿇고 물걸레로 마루 청소를 깔끔하게 마무리 했다. 금발의 백인 여자가 무릎을 꿇고 우리 집 마루와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내게 하나의 의문이 솟아 올랐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무엇이 즐거이 잔디를 깎아주고, 집안 일을 행복하게 도와주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우리가 후터라이트 친구들을 도와 줄 때에 그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었다.

가을 수확 철이 되면 농사를 짓는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무척 바빠진다. 이들은 대규모 복합 농을 한다. 닭장, 돼지 축사, , 거위, 감자 농사, 각종 야채, 밀 농사, 옥수수 농사 이들의 농사 규모는 한국 기준으로 보면 상상을 초월한다. 수확 철에는 집중 적인 노동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은 숫자지만 도와주러 간다. 감자 캘 때도, 수만 마리의 닭을 잡고 정리할 때에도, 우리의 수작업이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주러 가곤 했었다. 그러면 이들이 너무 기뻐하며 환영하곤 했다.

이들과의 노동은 마음 깊은 곳을 만지고, 황홀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곤 했다. 육체는 힘들었는데 내 영혼은 기뻐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도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씻은 닭을 아이들이 걸어주면 우리는 이를 하나씩 포장을 해야 했다. 한 사람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 다른 이들은 화음을 넣어서 독일어로 화답을 했다.

같이 노동을 하는 한 여자분이 놀라운 고백을 했다. 우리는 너희를 위해서 노동()을 하고, 너희는 우리를 위해서 노동()을 한다. 서로를 위해서 바쳐진 삶을 살고 있다. 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이를 단서로 일이 끝난 다음에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대화를 시작 했다. 대화 결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노동을 함을 알았다. 후터라이트에 의하면 노동을 통한 몸을 바침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들에게 사랑은 감상도 아니고, 추상적인 교훈도 아니다. 이들에게 사랑은 구체적인 노동으로 표현된다. 자기를 살아 있는 제사로 주는 헌신으로 사랑은 표현 되었고 실천되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일을 해주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이들의 엄청난 노동 생산성의 비밀을 알아 내었고, 이러한 영성의 기초로 인해서 핍박과 추방으로 반복적인 재정적인 재난에 직면하면서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던 영적인 자산을 발견했다.

그 때 안 사실이 있었다. 천국에 대한 그림이 달라진 것이다. 천국은 강가 잔디 위에서 하프 소리를 들으면서 비치 파라솔 밑은 의자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바쳐진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드리는 곳에 천국이 있음을 알았다.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제사로 서로를 위해서 드려진 삶을 사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있는 곳이 천국이었다.

우리 집 잔디의 비밀이 풀렸다. 그 영혼이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후터라이트 형제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적극적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우리가 없었다. 그리고 잔디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잔디를 깍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잔디를 깍게 만든 것이다.

노동으로 자기를 드리게 만드는 사랑과 진리가 공동체의 기초이며 힘이었다. 여기 이 땅에 하나님 왕국, 곧 천국이 있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oreign-experience-of-heaven

캐나다 개척 시대의 흔적

2008년 방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우리 아이들과 우리들은 퍼스트 미니스터를 그렇게 부른다.)가 우리를 자기들의 엔틱들을 모아논 곳을 보여주겠다면 데리고 같다. 거기에 오래된 다리미, 장난감,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였는데, 접이식이었다. 나는 왜 접이식이냐고 물었다. 그 사연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후터라이터는 칼을 쓰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들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 2:4'의 말씀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2:4)

후터라이트는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떠난 역사가 있다. 고생 끝에 개척해서 얻은 비옥한 흑토 땅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전쟁에 나서라는 정부의 요구 때문이었다. 187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고생 끝에 겨우 개척이 끝났는데, 미국 정부도 이들의 평화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에 요구에 적극적으로 항의한 후터라이트 젊은이가 알카트라즈에서 죽어 나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화운동은 세련되고 그리 위험한 운동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평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이전에 트라실베이나, 그 이전에 항가리, 그 이전에 모라비안, 그 이전의 티롤, 그 이전의 스위스에서처럼 이들은 개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첫 겨울이 힘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집에( 40) 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접이식 세면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2009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에 젊은 친구에게 들었다.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80년이 되어서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다고 한다.

이들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감동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아린 것을 느낀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치룬 대가 때문이다.

자기 번영을 위한 선택과정 중에 고생이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인 고난의 선택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질고를 아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 53:3) 이들의 삶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남의 고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1:24)

젊었을 때에 자기 몸 하나 던지는 것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그나마 기득권이라도 가진 사람이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믿음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운동을 하건, 또는 선교사로든 헌신을 했지만, 결혼 이후,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난 이후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의 길로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도의 길은 모든 것을 걸을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길이다. 근 500년간 기독교 공산사회의 삶을 살아온 후터라이트의 걸어온 자취와 존재는 비용을 먼저 계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의 엄중함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 14:28)

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1-ENG

왜 후터리안만이 거기까지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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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ct Biblicism 때문이다. [1] 다수 개신교도보다 소수 Anabaptist가 성경적용에 있어서 엄격하다. 그 Anabaptist 중에서도 Hutterites가 사적 소유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지키는 것에 더 엄격한 면이 있다.

부자 청년의 비유를[마태 19:16~22] 통해 부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제로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이 주제는 피하고, 듣는 자도 이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아가 거부하는 주제는 모두 피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주류를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류 제도 종교의 게임의 룰이다.

후터리안은 성경, 특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말씀을 받기 어려워서 다시 자아의 요구와 기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초대 교회만 실행 가능했던 기독교 공산주의적 삶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부자와 이 시대의 부자들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돌이킨다면 등에 실려 있는 재물에 걸려서 바늘귀 문을 통과 못한 낙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낙타가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다. [마태 19:24] 낙타는 그래도 등에 진 짊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리면 바늘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등에 짊어 진 짊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와 달리 부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처럼 짊어진 재산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들이 삶은 사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헌신되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바쳐져 있다.

부자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성공했다. 낙타와 달리 그들이 보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산은 영혼의 짊이 아니라 이땅에서 육체적 삶을 유지시켜주는 반석이고, 산성이고, 생명줄로 여기지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기 쉽다.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많은 재산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재산을 짊어 진체 바늘귀를 통과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바램에 따라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려 하는 유혹에 잘 빠지기 쉽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핍박하는 지리까지 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얼마 안되는 재산을 쉽게 버릴 수 있어서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 곧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위해 헌신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즐거히 들어온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좋은 거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 13: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묶여 있는 짊이 있다. 재산의 짊이 무거울 수록 집착도 더 강하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하늘 나라를 얻는 거래가 남는 거래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데 더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한 것이다. 

__________

[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was-it-only-the-hutterites-who-went-that-far

사유욕의 제거로 시작되는 공동체 삶의 질서

#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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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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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Lead to Community of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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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_________________

[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후터라이터와 문서

[Msg551] &10/21/2011 11:33:56 AM

후터라이트는 간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500년 가까이 무소유 공동체를 이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길은 쉽지 않았다. 500여년전 약 5만명이었던 사람들이 한때 15명으로 줄어들 정도의 대학살도 경험했었다. 소수의 남은 사람들의 겨우 다시 공동체를 시작했을 무렴에 전쟁터 한가운데 던져지기도 했었다. 삶의 터전이 전쟁터가 되었을 때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 아무도 살아보지 않았고 개척되지 않은 땅으로 들어가서 기아에 허덕이기도 했다.   

수많은 그들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실행에 대해서, 삶에 대한 얘기를 알려주기 위해 외부 세계에 향해서 위해 펜을 든 후터라이트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오히려 외부세계는 후터라이트에 대해 관심이 많고, 너도 나도 후터라이트의 정체와 믿음, 실행에 대해서 떠든다. 최근들어 많은 사회공학자들, 신학자들, 공동체 운동가들 등등이  저 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이들에게 왔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후터라이트 또는 아미쉬와 같은 아나뱁티스트 공동체를 살펴보고 논문을 내고, 책을 발간한다.

그들이 후터라이트에 관심을 보이는 부분적인 이유는 그들의 위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후기 기독교 사회에 접어든 서구 사회는 그들의 과거의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주류 기독교 사회는 서서히 움추려 들고 있다.

번잡스러운 새삼스러운 관심에 내가 아는 후터라이트는 시쿤둥하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떠들고 관심만 보이지, 실재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사랑과 순종이 없고 그 결과 삶이 없다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제임스 밸리 콜로니의 문은 외부 세계 방문자에 대해서 연지 이미 20년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아직 후터라이트들이 했던 것처럼 “서로의 필요를 위해 드려진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 말은 많은데 “사랑”이 없는 것이다.

Smiley face

그들의 눈에 후터라이트와 아나뱁티스트에 관련된 수많은 논문과 책과 학술회의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보이는 것 같다. [고전 13:1]

그들에게서 종교적 위선자들에 대한 피곤함을 자주 발견한다. 자기를 죽음에 넘김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고, 기독교 신학과 교리에 대해서 논쟁하 것만으로 자족하고 자긍하는 종교쟁이들에 대한 거부감 있다. [ 7:26]

그들은 그들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들 사이의 친밀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도 그들은 먼저 침묵의 노동을 통해서,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현실성과 진실을 증거 하려 하지 함부로 자기 소리를 높이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펜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삶의 증거를 통해서 외치는 그들 영혼의 외침의 존재를 증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와서 보고 그들의 삶의 헌신이 얘기하는 바를 주의 깊게 보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불러 오려면, 누군 가는 메신저가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document-of-hutte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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