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와 노동가치설

&2/20/2014 4:50:19 PM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이후 아담 스미스가 설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설명을 한 맥락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상인계급의 불의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경제 이념은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였다. 상인들은 중상주의의 논리에 따라 상업을 보호하라고 국가권력에 개입하여 권력을 조정하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상주의 논리로 그들 상업권력을 위한 불공정 경쟁 체제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주장했다. 자유로운 공정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체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강자의 불공정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논리로 보이지 않는 손이 강조된다. 예수님처럼 아담 스미스도 기득권의 수호자로 강탈되어 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아담 스미스의 명성과 그의 아이디어는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대자본이 자유롭게 불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앞세워서 정글 자본주의 또는 해적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소수 부자와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도 중농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바늘공장의 비유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는 조직된 노동력이 결국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기술도 새로운 생산방식도 결국 훈련되고 조직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포드이즘의 컨베이어 시스템도,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도, 반도체 개발도, 인터넷 혁명도 사람, 곧 훈련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개별적 노동력이 잘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조직되지 않고서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문제는 노동의 조직에 있다.

불행히도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스스로 조직하고 초기의 위험을 감수할 재정적 심리적 역량이 없다. 때문에 결국 조직화되고 훈련화된 노동이 창출할 수 있는 부는 노동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개별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자들은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의 부품이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생산성 혁명은 있었으나, 공평치 못한 부의 분배로 더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이전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자금이 있다먼저 당장의 재정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 생산체제는 자본가의 몫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이 없는 노동가들이 기술이 있어도안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결과가 좋을 경우 재주는 노동가가 부리고 가치생산 체제의 소유권을 가진 자본가와의 분배의 게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소자본 창업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 노동자는 월급이라도 챙기지만, 창업자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자본이 없는 다수는 노동자의 길, 봉급쟁이 삶을 선택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가치를 창출한 노동력에 더 많은 부가 배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탐욕을 미워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 곧 자본가들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노동자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가는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뭉치하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자본가가 조직한 개별 회사 내에서 파생된 조직이다.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가 있고 난 다음에 파생적으로 그 회사의 노동조합이 있다. 파생조직이기에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공산주의 이상을 보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려 하고, 신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쓰고, 증오와 투쟁의 희생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증오와 투쟁을 심어 주는 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옳았지만, 불의를 해결하는 에너지를 불의를 만든 에너지에서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기 쉬운 우울하고 안타까운 운동이었다.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불의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보다는 나아 보인다. 무책임하게 역사적 책임을 방임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적 불의에 저항한 이들 때문이라도 우리의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00년전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등장했을 때에 지배체제에 위협이 된 것은 후터라이트 노동자들이 중세의 농노처럼 토지를 가진 지주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를 통해서 노동을 조직화 했다. 그들의 사회안에는 영주, 지주와 같은 폭력과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인 지배계급도 없었다. 자본가와 같이 축적된 자본의 ���을 지렛대로 다수를 지배하고 하는 자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되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영주도, 기사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자치를 했다. 자본가들의 자본 없이 노동을 조직했고,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조직화된 노동에 기초한 부를 창출했다.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잘 사회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지속시켰다.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아나뱁티스 그룹이 한 때 구교 신교 보다 많았었다고 한다. 가혹한 박해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달라 졌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무장 혁명론자들이 갖고자 하는 국가폭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고도 공산주의를 실행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의 에너지가 아닌 자기부인과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었다. 즉,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지배한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동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주, 지주 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가톨릭과, 신흥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폈던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터라이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후터라이트들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체제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될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리더들은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아나키즘이 유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유럽은 붕괴되고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지주나 자본가 주도하는 지배와 종속관계라는 사회적 틀에 대중들이 복속되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라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룰지라도 반드시 이를 선택을 하려 저항하고 투쟁할 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치적 공동체라는 대안의 존재, 당시에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를 세상에서 없애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12개 그룹 이상 되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 대부분은 사라졌다. (지금은 3개 그룹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마저 지우려 했다. 이제 역사의 계절이 바뀌어 3개, 7개, 12개 이상의 자발적 아나뱁티즘 그룹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아나뱁트스트에 대한 적대감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처럼 이들이 배척당하고 죽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죄명은 예수님처럼 반역죄였다. 정치적 죄였다. 아나뱁티스에 대한 대학살 사태를 일으킨 드러난 명목은 종교적이었다. 더 깊은 곳에는 정치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내적으로는 이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라 본다. 

라카츠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립한다. [세상과 대립 발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디서나 이 두 세력은 서로 싸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 그러나 조직화고 훈련된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노동자가 누리기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를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조직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연대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몫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먼저 리스크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노동력 조직화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자기가 대고 리스크를 먼저 지기 때문엔 분배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갈등이 근대 세계를 이끌어 왔다. 2012는 협동조합의 해라고 했다. 이제 피가 흥건한 근대를 마무리를 하고 협력의 시대를 열 때가 아닐까?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모델이며, 증명된 모델이다. 후터라이트는 500년여년 이 방식으로 살아왔다. 즉, 500여년 이상의 세월로 증명된 삶의 모델이다. 

공동체, 또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본가에만 집중된 부가 편중된에 현실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슬퍼하고 그에 따른 불의를 분노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타도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온다. 외부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내부를 향하고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극이다.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킬링필드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동경대에서도 이 일이 일어났다. 

먼저 자기 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와 같은 죄가 악한 구조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때문에 들보를 빼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위탁하고 헌신함으로 세상이 질서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한다고 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communities-and-labor-theory-value

왜 후터리안만이 거기까지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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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ct Biblicism 때문이다. [1] 다수 개신교도보다 소수 Anabaptist가 성경적용에 있어서 엄격하다. 그 Anabaptist 중에서도 Hutterites가 사적 소유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지키는 것에 더 엄격한 면이 있다.

부자 청년의 비유를[마태 19:16~22] 통해 부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제로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이 주제는 피하고, 듣는 자도 이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아가 거부하는 주제는 모두 피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주류를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류 제도 종교의 게임의 룰이다.

후터리안은 성경, 특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말씀을 받기 어려워서 다시 자아의 요구와 기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초대 교회만 실행 가능했던 기독교 공산주의적 삶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부자와 이 시대의 부자들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돌이킨다면 등에 실려 있는 재물에 걸려서 바늘귀 문을 통과 못한 낙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낙타가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다. [마태 19:24] 낙타는 그래도 등에 진 짊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리면 바늘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등에 짊어 진 짊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와 달리 부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처럼 짊어진 재산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들이 삶은 사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헌신되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바쳐져 있다.

부자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성공했다. 낙타와 달리 그들이 보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산은 영혼의 짊이 아니라 이땅에서 육체적 삶을 유지시켜주는 반석이고, 산성이고, 생명줄로 여기지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기 쉽다.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많은 재산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재산을 짊어 진체 바늘귀를 통과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바램에 따라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려 하는 유혹에 잘 빠지기 쉽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핍박하는 지리까지 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얼마 안되는 재산을 쉽게 버릴 수 있어서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 곧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위해 헌신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즐거히 들어온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좋은 거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 13: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묶여 있는 짊이 있다. 재산의 짊이 무거울 수록 집착도 더 강하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하늘 나라를 얻는 거래가 남는 거래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데 더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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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was-it-only-the-hutterites-who-went-that-far

사유욕의 제거로 시작되는 공동체 삶의 질서

#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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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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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Lead to Community of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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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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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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