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시기심라는 지옥, 겸손 속의 천국

&3/11/2014 11:07:14 AM

90년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클린턴 정부의 IT 권장 정책으로 미국의 IT 분야는 돈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미국 IT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이 미국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장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한국 가게를 들러야 했다. 그 동네 신출내기였기에 인사를 해야 했고 소개를 해야 했다. 여기서 낯선 감정들을 경험했고, 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균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만 접촉할 수 있었다. 사는 동네가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의 복잡 다단한 심리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계급 상승을 추구한다. 교포 사회에서 이민 1세들의 꿈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Msg15]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들이 꿈꾸는 주류 사회 진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부러움이 있었고, 질투가 보였다. 

교포사회 사람들은 흔히 못사는 흑인 동네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흑인들은 보통 장사를 잘 하지 않는다. 동네가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백인들도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꺼린다.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도 이 점을 알고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 시작해 성공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인이나 유대인이나 무주공산을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해서 재정적 성공을 한 점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공한 이후 성공을 누리고 관리하는 방식이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의 다른 점이라 한다. 

성공을 하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부유한 백인 교외 지역으로 이사하고 낡은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주급과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랑스럽게 BMW, 벤츠, 렉서스와 같은 고급 차를 몰고 출근한다. 이 차를 당당하게 가게 앞에 주차함으로써 자신들이 최근에 획득한 경제적 신분을 과시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즐기고 자신의 상처입은 열패감을 만회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들이 비참한 느낌을 들게 함으로 얻는 더러운 만족감을 즐긴 것이다. 한국인들 끼리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하던 비교 질 자랑 질 버릇이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새는 박아지가 미국에서도 샌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랑 질이 시작이 되면 조만간 그 가게가 흑인 강도에 의해 털린곤 한다고 들었다. 흑인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기들 주머니를 털어서 부자가 되었음에도 흑인들과 친구가 되어 흑인 사회에 공헌을 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차부터 바꾸고 이웃인 흑인들로부터 스스로 분리 구분하고 거만하게 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이렇게 저렴하게 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한국들의 삶과 성공에 대한 동기가 멸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활한 유대인은 성공한 이후에도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 몰던 낡은 차를 몰고 가게에 간다고 한다. 비록 집은 멀리 교외 지역으로 이사 했어도 가게에 출근 할 때에는 옷도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 있는 고급 차는 절대로 가게로 몰고 가지 않는다. 흑인들이 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끔, 그리고 유대인 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에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온몸으로, 태도에서, 차에서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오만한 길로 살다가 흑인들의 사회적 분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행히 이제는 교포 사회는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졌다.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한국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안의 반사회적 또는 반공동체적 요소는 이렇게 다른 문화와 비교하고 접촉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경우 2,000년 전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고 방랑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다수 이방인에 둘러 쌓여 있는 삶이었다. 유대인이 가난하던, 부자던 이는 쉬운 삶이 아니다. 가난하면 무시하고 차별 당한다. 부자이면 질투하고, 심하면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흑인 사회와 노골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를 획득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경우 아직은 어설프다.

우리 모두 안에 자신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파괴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이들이 실패하는 것을 봐야 만족이 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유대인은 잘 이해하고 처신하고 있는 듯 했다.

펜실베이니아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다른 주의 한국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교회 주차장에 벤츠, BMW, 렉서스, 아큐라가 많은지! 사람들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지, 수입의 규모가 어떤 지를 아는 나로서는 황당한 그림 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겪는 사회적 좌절감을 교회라는 사회 속에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고 좌절된 그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보상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병든 마음 상처 받은 자존심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안타까웠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고 펜실베니아 웨스터체스터 카운티에 살았었다. 바로 옆이 랭커스터 카운티였다. 우리는 웨스터체스터와 랭카스터 카운티 경계에 살았었다. 우리가 가는 월마트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었다. 이들이 아미쉬였다. 우연히 우리는 아미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들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나뱁티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 중 하나를 가게 되었다. 한국 교포 교회와 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가장 눈에 뛴 차이는 자동차였다. 고급 차가 하나도 없었다. 반짝반짝한 최신 중형차도 없었다. 차들은 대부분은 낡고 겸손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고급 명품을 걸치지 않았다. 명품 전시장이었던 한국인 대형 교회의 모습과 판이한 차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지에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Plain People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이 Plain People이라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게 한 내적 기반을 이해하자, 근본적인 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은 Plain People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묶이지 않고, 노예가 되어 죽기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외적 표현이 그들의 자동차였고, 옷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우리는 한참을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예배 후 약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외에 아무도 교회를 떠나기 위해 주창장으로 나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아무도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개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처럼 같은 집단 내의 이웃을 패배자(Underdog)로 만들어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칭찬하는 시녀와 팬클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웃을 딛고 일어서서 내려다 보기 보다는 오직 위로만 향하는 야망의 길에서 내려와 다들 교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를 안부를 궁금해 하고 겸손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봤다. 당시 나는 고연봉 자였다. 아큐라라는 혼다 고급차 브랜드를 몰았었다. 다음에는 렉서스나, BMW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정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흔한 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생각 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이고, 비난 받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운 삶의 방식임을 보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사탄의 생각,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생각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를 방문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쪽 팔렸다.

그 이후 우리도 자발적인 아나뱁티스트가 되어서 그들처럼 스스로 Plain People이 되어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즉, 다른 이들의 세상적 성공을 질투하지도 않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어떠함을 차나, 집, 옷, 사회적 지위, 학위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교만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부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세상적 성공을 Show Up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처럼 Plain People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천국을 보았다. 서로가 은밀히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멸시하거나 남몰래 비참해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누가 잘나가지는 가지고 관계의 긴장이 없었다. 누가 더 잘 낫는지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낮아지기로 결정하고, Plain People 중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자 평화가 있었다. 거기에 천국이 있었고 참 공동체적 관계가 있었다.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9/18/2013 2:15:33 PM

구약은 모세의 율법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율법의 대 강령은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40]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에게 새로운 한 개의 계명을 주셨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하나의 새 계명을 주심으로 율법을 더 완전하게 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요한복음 13:34]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15:12]

 구약적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라디아서5:14]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 형제에게 한 일이 곧 예수님에게 한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고백하고 주장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자칭 신도들을 예수님이 정한신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 하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이 서로 형제로 받아들여서, 예수님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다. 곧 자신을 죽여서 친구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 음료와 빵으로 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법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 하라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천국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그분처럼 자기(에고와 육체적 생명)를 죽이기까지 사랑의 명령에 순종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는 이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공동체의 실체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법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고 주여 주여 하면서 종교적인 실행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들은 천국의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을 어겼기 거기에 따라 심판이 임할 것이다.

양과 염소는 구분될 것이다. [마태복음 25:31-40] 곧 사랑을 실천한 양과 서로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구원만을 위해 자기를 높이고 종교적 외식과 자기를 위한 영성에만 열중한 염소를 가르고 심판을 하실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다. 성령을 거역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짓이다. 

이는 부자들과 기득권에 입 맛에 따라 만들어진 거짓 복음이다. 이기적인 내가복음에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종교적 외식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기(에고)를 비우고 낮추어 서로 종이 되어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길로 가야 한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고 종교적 외식과 종교적 지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들을 예수님은 저주 하셨다. 이들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만 지옥의 길(자기를 채우고 높이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길(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고 그들을 더한 지옥 자식(자기를 높이려는 자들)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1-15]

불행히도 공적인 기독교는 소유문제와 폭력문제에 실패했다. 역사의 고비마다 하나님 나라의 샘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충격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 왔으나, 공적인 교회에 의해 철저히 거부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공적인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one-commandment-of-jesus

 

고립된 초월적 경험이 아니라 성육신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

&2/17/2014 12:07:02 PM

고립적 명상은 자위 행위를 닮아 있다. 베드로의 초막은 나르시시즘적 이탈이다. [마 17:4]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홀로 즐거울 수 있는 길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곧 성육신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적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은 사랑의 안에 있고, 사랑은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고립적이고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르심은 동행이다. 천상 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를 향한 부르심이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친 짓을 그만 두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요 15:12]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헌신으로 즐거워하라. [요 15:11] 이게 예수의 길을 따른 자의 ‘도’이다.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한 손길, 배려의 말, 섬김을 통해 남편 또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른 길의 그림이다. 혼자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적 즐거움은 건강한 기쁨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기쁨은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안에 있다.

결국 사랑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 가야 할 길이다. 존재 자체가 다른 이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 사적 이익과 계산이 개입되지 아니해야 한다. [마 5:46~47] 아버지처럼 사랑을 은혜로 베푸는 자체를 기쁘게 여기는 사랑의 존재가 될때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 5:45

하나님은 사랑이다. [요일 4:8]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푼다. 그래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춘다. [마 5:45]

참 사람의 참 기쁨은 사랑 안에 있다. [요일 1:4, 요 15:11]

술이 잠시 기쁨을 주고, 마약에 환락에 취하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중독되면 건강하지 못하다. 자위적 기쁨이고, 자기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얻고 풍성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사랑이 선하고 아름답다. [요 10:10]

영적 수련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자기 자신의 구원과 기쁨만인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자기를 향한 자기 사랑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의 훈련과 즐거움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 [약 1:27]

더불어 즐겁고 천국 안에 있기 위해서는 사랑의 봉사와 섬김이 뒤 따라야 한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노동의 즐거움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본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누리고 생명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형제자매의 관계 안에서 형제 자매를 위한 노동과 섬김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이것이 육과 에고를 거슬러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 있는 육체를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롬 12:1]

자신을 드려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즐기는 행복을 누려라. 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이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지옥과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노예 삼고자 하는 곳이다.

천국적 삶의 방식을 내면화 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적 삶이 형태나 나타나게 된다. 이들의 삶의 내용이 이 땅에 임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 중 하나이다. 

더 이상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가 공동체이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바쳐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자 공동체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isolated-mediation-and-the-dangers

캐나다 개척 시대의 흔적

2008년 방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우리 아이들과 우리들은 퍼스트 미니스터를 그렇게 부른다.)가 우리를 자기들의 엔틱들을 모아논 곳을 보여주겠다면 데리고 같다. 거기에 오래된 다리미, 장난감,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였는데, 접이식이었다. 나는 왜 접이식이냐고 물었다. 그 사연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후터라이터는 칼을 쓰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들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결과적���로 이들은 ' 2:4'의 말씀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2:4)

후터라이트는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떠난 역사가 있다. 고생 끝에 개척해서 얻은 비옥한 흑토 땅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전쟁에 나서라는 정부의 요구 때문이었다. 187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고생 끝에 겨우 개척이 끝났는데, 미국 정부도 이들의 평화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에 요구에 적극적으로 항의한 후터라이트 젊은이가 알카트라즈에서 죽어 나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화운동은 세련되고 그리 위험한 운동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평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이전에 트라실베이나, 그 이전에 항가리, 그 이전에 모라비안, 그 이전의 티롤, 그 이전의 스위스에서처럼 이들은 개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첫 겨울이 힘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집에( 40) 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접이식 세면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2009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에 젊은 친구에게 들었다.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80년이 되어서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다고 한다.

이들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감동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아린 것을 느낀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치룬 대가 때문이다.

자기 번영을 위한 선택과정 중에 고생이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인 고난의 선택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질고를 아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 53:3) 이들의 삶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남의 고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1:24)

젊었을 때에 자기 몸 하나 던지는 것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그나마 기득권이라도 가진 사람이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믿음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운동을 하건, 또는 선교사로든 헌신을 했지만, 결혼 이후,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난 이후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의 길로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도의 길은 모든 것을 걸을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길이다. 근 500년간 기독교 공산사회의 삶을 살아온 후터라이트의 걸어온 자취와 존재는 비용을 먼저 계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의 엄중함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 14:28)

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1-ENG

사귐으로 세워지는 천국과 사역적 비전으로 파괴되는 천국의 관계

&2/10/2014 11:21:07 AM

천국은 사귐으로 시작되고 공동체는 사귐으로 세워진다. 천국은 사역적 비전의 탈을 쓴 종교적 야망 때문에도 핍박 받는다.

종교는 사역적으로 비전 또는 신념으로 시작된다. 사역적 비전 또는 신념으로 모인 사람들은 결국 사역적 비전 때문에 흩어진다. 사역적 비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흩어지고, 사역적 비전이 성공했을 때에 새로운 사역적 비전이 나타나다. 자동적으로 자기가 본 이념적 비전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시작됨에 따라 분리가 시작된다.

이념적 비전으로 뭉친 이들 사이에서는 사귐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사역적 비전이 이끄는 관계는 이념적 비전을 위한 효용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본다. 효용성이 떨어졌을 경우 관계는 멀어진다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에 부합하지 않으면 서로 배제하고 탄합한다. 

공공의 이익,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념적 비전처럼 보였던 것은 개인적 야망으로 쉽게 변질이 되기 쉽다. 사역적 비전은 쉽게 이념적 야망이 된다.

개인적 야망이 된 이념적 비전은 우상이다. 주위의 어느 누구든 사역적 비전을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허울이 씌워진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에 홀린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애지 중지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이용할 대상으로 보기 쉽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이런 방식으로 계몽주의적 인간은 파괴적 존재가 되기도 한다. 교만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사귐이 되는 사람을 찾아 사귀고 사랑하라.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듣기를 원할 때에 사귐의 틀안에서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다.

 

사역적 비전이라 이름하는 에고의 야망이 투사하는 우상이 세워지면 결국 세상적 관계가 나타난다. 우상을 위한 제사장이자 폭군이 있고, 종교적 허울에 속은 가련한 희생자 그룹이 존재하게 된다. 무지와 아집화한 종교가 하느님의 나라를 대체했을 때에 이 일이 일어난다.

공동체를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를 사역적 비전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이들은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공동체들이다. 다른 공동체는 경계하고 경쟁해서 복속시켜야 하며 심지어 사라져야 할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모든 것은 에고의 놀음일 뿐이다.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가장 반가워 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하나남 나라의 관계 곧 공동체 안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짐을 같이 지는 동역자이다. 다른 공동체 역시 하나님이 세운 나라이고 백성이며 형제로 여긴다. 즐거히 사귐을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에고를 의해서 에고를 위해서 에고를 통해서 살고 일하지 않는다. 그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heaven-based-on-love-vs-ministry

왜 후터리안만이 거기까지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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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ct Biblicism 때문이다. [1] 다수 개신교도보다 소수 Anabaptist가 성경적용에 있어서 엄격하다. 그 Anabaptist 중에서도 Hutterites가 사적 소유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지키는 것에 더 엄격한 면이 있다.

부자 청년의 비유를[마태 19:16~22] 통해 부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제로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이 주제는 피하고, 듣는 자도 이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아가 거부하는 주제는 모두 피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주류를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류 제도 종교의 게임의 룰이다.

후터리안은 성경, 특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말씀을 받기 어려워서 다시 자아의 요구와 기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초대 교회만 실행 가능했던 기독교 공산주의적 삶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부자와 이 시대의 부자들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돌이킨다면 등에 실려 있는 재물에 걸려서 바늘귀 문을 통과 못한 낙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낙타가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다. [마태 19:24] 낙타는 그래도 등에 진 짊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리면 바늘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등에 짊어 진 짊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와 달리 부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처럼 짊어진 재산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들이 삶은 사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헌신되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바쳐져 있다.

부자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성공했다. 낙타와 달리 그들이 보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산은 영혼의 짊이 아니라 이땅에서 육체적 삶을 유지시켜주는 반석이고, 산성이고, 생명줄로 여기지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기 쉽다.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많은 재산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재산을 짊어 진체 바늘귀를 통과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바램에 따라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려 하는 유혹에 잘 빠지기 쉽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핍박하는 지리까지 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얼마 안되는 재산을 쉽게 버릴 수 있어서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 곧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위해 헌신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즐거히 들어온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좋은 거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 13: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묶여 있는 짊이 있다. 재산의 짊이 무거울 수록 집착도 더 강하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하늘 나라를 얻는 거래가 남는 거래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데 더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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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was-it-only-the-hutterites-who-went-that-far

사유욕의 제거로 시작되는 공동체 삶의 질서

#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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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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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Lead to Community of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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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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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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